[ 한 일 경제협력 공동성명 ]

간사이 한.일경제간담회는 간사이 게이단렌과 오사카상공회의소 공동주최
였다.

도쿄와는 회의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환영열기가 뜨거웠다.

또 연고로 보나 산업관계를 따져 보나 도쿄가 아니고 간사이 중심으로
한.일경협이 추진돼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간사이지방은 섬유 등 한국이 당장 필요로 하는 경공업의 중심지다.

필자는 지난 63년 구로동 수출산업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일본에 왔을 때
수출품 샘플 대부분을 이곳 중소기업에서 주로 수집해 간 것이 기억났다.

특히 오사카 고베는 재일교포의 중심지다.

도쿄경제인들은 오사카 상인들을 속칭 정상 또는 관상이라고 하면서
"정경유착"의 산물로 내놓고 비하하는 듯 했다.

스미토모, 미쓰이, 이토추 등 대표적 상사는 미쓰비시를 제외하고는
간사이에서 배출했다.

이들은 일본 자본주의 개척자들이다.

이들의 종교 윤리를 뒷받침한 것이 도꾸가와 막부시대의 정토진종과
이시다바이간의 석문심학이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대비시켜 따로 논한다)

한.일경제간담회 일정 중 공장방문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게 됐다.

불도저 등 건설장비 제조업체인 고마쓰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공장입구에 "데밍상" 큰 상패가 놓여있었다.

"QC" 즉 품질관리 우수상이었다.

작년에 받았다고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세계적 불도저 메이커인 캐타피라사를 벤치마킹해 따라 잡으려는
고마쓰사가 외국사람 이름을 딴 "데밍상"을 타고 이다지 좋아하는데는 약간
의아하게 생각했다.

데밍박사는 미국출신 통계학자로 통계방법을 원용한 품질 향상, 즉 QC
운동의 창시자다.

자기나라인 미국에서는 전혀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48년 일본을 첫 방문해
QC운동을 전파하는데 성공했다.

일본사람들이 외국에서 배우려는 진지함에 필자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실 오늘날 고마쓰는 불도저, 농기구 메이커로서도 당당히 미국 캐타피라사
와 자웅을 겨루고 있다.

도쿄로 돌아와 문제의 공동성명 작성에 착수한다.

서론에서는 한.일경제상황을 요약한다.

66년은 한국경제가 5.16후의 긴 표류를 거쳐 드디어 성장의 시동이 걸린
해였다.

무엇이 잘 되고 있다는 여론이 한 조사에서 50%이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필자는 65년 7% 성장, 66년 8% 전망 그대로 막 도약을 시작한 한국경제에
일본이 동참할 것을 역설한 것으로 기억한다.

구체 내용에 들어가서 첫째 경제협력 부문에서는 일본의 투자, 특히
적극적인 차관제공을 촉구했다.

일본의 기술.자본과 양질의 한국노동력이 합세하면 세계최고의 경쟁력있는
상품을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둘째로 산업.기술분야에는 일본의 사양산업을 한국에 이전하는 문제와 또
기술이전 관련 연수생 수용과 전문가 파한 등을 구체적으로 논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세부안을 세워 즉각 추진키로 한다.

셋째는 무역증진분야였다.

당시 보고서를 보니 사절단은 고질화된 한.일간의 무역불균형 시정을 최우선
과제로 지적했다.

65년 12월 현재 대일 수출 4천7백20만달러, 수입 1억4천4백80만달러로
8천7백50만달러 적자였다.

무역불균형 시정방안으로 가공무역, 특히 보세가공의 증진, 1차 상품
일본수입, 쿼터확대 등을 촉구했다.

또 약소국 경제교류 장애요인인 출입국 관리완화 등을 촉구했다.

이러한 공동성명의 구도와 내용은 서두에서 지적한대로 70년대, 80년대까지
의 모델로 이어진다.

그러나 필자가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무역불균형이 시정되지 않고
있는 점이다.

일본이라면 이런 문제를 어떻게 했을까 가끔 생각해 본다.

21세기를 이 상태로 끌고 갈 것인가...

이민족이 크게 반성할 과제가 아닌가.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