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고민이 적지않은 모양이다.

부산에선 불매운동이, 수원에선 삼성전자 제품을 애용하자는 시민운동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쪽도 결코 조용하지만은 않다고 한다.

냉장고 등 백색가전 부문은 광주로 옮기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부산으로
간다는게 웬말이냐며 반발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다.

왜 이런 일이 빚어졌는지 원인을 따지자면 얘기가 길어진다.

지역간 갈등이나 미묘한 정치상황 등과도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니다.

어쨌든 회사입장에서 보면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물론 삼성측에도 책임이 없다고 하기는 어렵다.

백색가전을 광주로 옮기겠다고 했던 것도, 또 삼성자동차 뒤처리와 관련해
이를 다시 부산으로 옮기겠다고 밝힌 것도 삼성그룹이니 스스로 원인행위를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회사측 입장에서 그동안의 상황전개를 되새겨보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는 측면도 결코 없지 않다.

부산 경제를 삼성자동차가 온통 망친 것처럼 성토가 대단한 분위기에서는
가전이라도 부산으로 옮기겠다는 대안을 제시할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설명, 그것은 꼭 궁색한 자기 변명이라고 폄하할 일만은 아니다.

대우그룹의 유동성개선계획 발표도 같은 시각에서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김우중 회장은 구조조정에 성공해도 대우자동차 경영이 정상화되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기로 했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대우그룹은 대우자동차 주식 등 담보를 채권단이 임의로 처분해도 좋다는
각서와 함께 제출한 만큼 김 회장의 거취는 물론 그룹 전체의 앞날을 채권
은행단의 판단에 맡겼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봐 김 회장의 퇴진을 거듭 못박아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대우그룹이나 채권은행단의 이번 발표는 그 자구
하나하나가 정부당국의 사전검토를 거친 것이라고 단정해도 아마 틀림이 없을
것이다.

관료들이 주도하는 우리나라의 대기업정책에서는 "국민정서법"이라는 게
헌법보다 우선하는 게 보통이다.

사업다각화는 문어발경영이라며 죄악시하고, 창업자나 대주주는 경영에서
손을 떼고 전문경영자에게 맡기는 것이 지선이라는 게 그 엄청난 법의 주요
골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경제력집중이 심하다는 인식은 꼭 옳다고 하기 어렵다.

30대그룹이 금융.보험업을 제외한 전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부가가치
기준 13%, 매출액 기준 45%, 종업원 기준 4.2%인데 이는 심한 편이 아니라는
게 연구기관들의 일반적인 평가다.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은 우리나라의 경제력 집중도는 OECD(경제협력개발
기구) 회원국에 비해 높지 않다고 밝혔고, 한국의 6대그룹 집중도는 일본의
6대그룹에 비해서도 낮은 편이라는 게 송병락 서울대 교수의 분석이다.

실제 이상으로 경제력집중에 대한 우려가 크고, 그래서 대기업에 대한
정서가 나쁜 것은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자본주의 역사가 짧은 탓이다.

효율지상주의의 고도성장 과정에서 자원배분이 왜곡된 일면도 결코 없다고
하기 어렵지만, 대기업의 성장을 제로섬게임의 결과인 양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다.

대기업이 국가경쟁력의 기본이라고 보면 한국 대기업그룹에 대한 외국의
비판적 시각에 꼭 동조해야 할 이유도 없다.

대기업그룹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고 대기업정책에서 "국민정서"가 강조되는
양상인 것은 걱정스럽다.

숱한 문제를 야기한 이른바 빅딜도 그렇고,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해도 국내
기업보다는 외국기업을 선호하는 듯한 대한생명 처리도 그렇다.

경제력집중에 대한 우려 등 그 어떤 주장도 국내 대기업을 외국기업에 비해
역차별하는 시책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부채비율 축소요구도 생각해 볼 대목이 있다.

30대그룹이 부채비율을 2백% 이하로 낮추려면 1백조원이 넘는 유상증자나
총자산의 50%에 해당하는 2백조원어치의 매각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과연 가능할지,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 대기업그룹에 대한 국민정서는
그래서 더 악화되고 그 때문에 새로운 대기업 규제나 강제적인 해체론이
나오게 되는 것은 아닌지...

바로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대우그룹이 추진하고 있는 자산매각과 별도로
채권단이 계열분리 작업을 하게 될 것"이라는 이헌재 금감위원장의 말은
더욱 걱정스럽기만 하다.

대기업구조조정은 효율을 높여 세계적 기업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과감한 지원이 있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특혜시비를 낳지않는 것이 대기업정책의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일 수는
없다.

정말 어떻게 하는 것이 전체 국민경제를 위해 바람직한 것인지, 대기업
정책을 국민정서가 아니라 철저한 경제논리로 재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
시점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7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