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남녀관계에선 많은 착시현상을 일으켜 실수를 거듭했어도
사업에서는 실수를 하거나 엉뚱한 결과로 치달아서 괴로움을 당한 기억이
없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남자친구들과의 사교적인 관계에 사업보다 열성을
덜 쏟는 결과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영신은 남편 윤효상이 너무도 싫게 굴어서 그가 많은 실수와
사기를 치도록 내버려두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아버지의 생각대로 윤효상에게 위자료로 자기의 실크회사를 주고
헤어지려고 시도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녀는 지영웅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어떻게 하면 두번째 남자로
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를 연구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윤효상은 거머리같은 남자였다.

최후의 순간까지 그녀를 우려먹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아버지, 저는 더 이상 윤사장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위자료를 많이 주면 이혼해줄게> 윤효상도 속으로 응수했다.

그는 미스 리의 젊고 나긋나긋한 피부의 감촉과 그녀의 봉실한 유방의
매혹에 지금도 온몸이 끓어 오른다.

그는 처음에 장난처럼 그녀를 범했다.

그러나 목적이 있는 미스 리는 그에게 완전히 헌신적으로 매달렸다.

그녀는 영신이 얼마나 육체적으로 돌같은 여자인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싫증이 잔뜩 난 부부사이에 끼여든 미스 리는 절호의 기회를 그들 부부
사이에서 쉽게 얻어냈다.

"윤사장, 이렇게 우리 딸애가 자네에게 염증을 내고 있으니 도무지 가망이
없는 결혼생활이 아닌가?"

"아닙니다. 저는 결코 이혼을 하지 않을 겁니다."

"기어코 법정에 서겠다는 거예요? 뭐예요?"

기가 막혀 하면서 영신이 울상을 한다.

항상 자신만만한 영신이 울상을 하자 윤효상은 기분이 날아갈듯이
통쾌하다.

저 여자를 실컷 괴롭혀주어야지, 그리고 무엇이든 자기맘대로 뜯어붙이기를
하는 그녀의 자존심에 구멍을 내주어야지.

그의 그런 속마음을 안 김치수 회장은,

"할 수 없군. 시간낭비지만 변호사들끼리 싸우도록 하는 수밖에.

나는 법원에 드나들면서 너희들이 후회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서
오늘 부른 것인데"

그는 냉철한 75세의 기업인으로 돌아간다.

"법정에서는 증거가 있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그리고 위자료는 더 적어질 수도 있다.

나의 제안을 다시 연구하기 바란다.

길게 말하는 것은 피곤하지만 자네가 우리 아이와 15년을 같이 키운
실크회사를 받고 이혼을 하든가, 더 적게 받을 수도 있는 이혼재판을 하든가,
양자택일하게"

그리고 그는 돌아선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좋은 김회장실에는 싸늘한 냉기가 흐른다.

그러나 윤효상은 고개를 꼿꼿이 세운채 장인에게 한마디 한다.

그도 냉혹해 보이는 김치수 회장과 결별을 결심한 이상 두려울 것이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