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31년 (1449)은 세종이 53세, 김종서가 67세가 되는 해였다.

세종은 지난해 먼저 세상을 떠난 왕비 심씨의 3년상 (3월24일)을 치르고
나서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경복궁 성내 동쪽 문소전의 서북쪽
공터에 7월7일부터 내불당을 짓기 시작하여 조정 대소 신료들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12월5일에 황금불상 삼존을 봉안하는 것으로 그 건립을
마무리짓고 경찬법회를 5일동안 베풀어 준공을 축하한다.

이때 소비한 공양미만도 2천5백70여석이었다 하니 그 규모를 대강
짐작할만 하다.

그렇지 않아도 병약하여 40대 이후부터는 안질과 각통 등 갖가지 질병에
시달려온 세종인데 이토록 심허증까지 겹치게 되니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31년 1월 27일에는 김종서 등 의정부 대신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자신의 건강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장차를 대비하라 이른다.

"내가 근년이래 여러번 슬픈 일을 겪고 질병도 몸에서 떠나지 않아
혹 부녀에게나 혹 환관에게 기뻐하고 노여워함이 일정치 않았었으나,
공사에는 감히 나타내지 않았었다.

근일에는 공사하는 사이에도 역시 그것이 일정치 않게 나타나고 또
지난해 10월사이에는 오심구역질 (가슴속이 불쾌해지면서 구역질이 나는
증세)을 얻었는데, 12월에 조금 낫더니 설 쇤 뒤에 다시 나타났고,
근일에는 또 나았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기뻐하고 노여워함이 일정치 않은 것을 내가 알고
있으니 이는 심히 혼매하지 않음이다. 만약 1,2년 뒤에 이르면 어두워져서
전혀 알지 못하리라 생각된다. 경등은 그것을 알아두라"

총명이 사라진다고 생각한 세종은 혹시 자신이 치매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측근 신료들에게 그럴 경우를 대비하도록 미리 경고하는 영명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러니 세종은 자신의 총명이 건재하는 동안에 마무리지을 일은
마무리지어 놓아야겠다는 바쁜 마음을 가지고 그 사이 미뤄두었던 큰일의
처리를 서두르는 듯하다.

바로 다음날인 1월28일에 "고려사"가 잘못되고 엉성하니 다시 지으라고
명령하면서 김종서에게 그 감장의 총책임을 맡기고 있으니 말이다.

드디어 2월1일에는 김종서를 의정부우찬성지춘추관사겸판병조사로 겸직
발령하여 "고려사"개찬과 달단의 침공에 대비하는 양대 당면 문제를
총괄하게 한다.

"고려사"는 태조때 정도전 (?~1398) 정총 (1358~97) 등이 편년체
(연대순으로 역사 사실을 기술해나가는 역사 서술방법)로 일단 편찬해
놓았으나 너무 소략하여 다시 태종때 권제 (1387~1445) 안지 (1377~1464)
남수문 (1408~43) 등으로 하여금 이를 보충하게 하였는데 이들이 자신의
가문을 허위로 빛나게 기록하는 등 공정치 못하게 기술하였으므로 세종은
당시 신료 중에서 가장 공정하다고 믿는 김종서를 그 총재관인
지춘추관사로 삼아 이를 고쳐짓게 하였던 것이다.

이에 2월 5일에는 고쳐짓는 "고려사"의 체제를 유교 사관에 입각한
정사체인 기전체 (임금의 사실을 기록한 본기와 신하들의 전기를 기록한
열전 및 천문지리, 문물제도를 기록한 지와 연표로 나누어 한 시대 역사를
총괄적으로 분류하여 기록하는 역사서술 방법)로 바꿔야 한다는 사관
신석조 (1407~59) 최항 (1409~74) 박팽년 (1417~56) 이석형 (1415~77)
하위지 (1415~56) 유성원 (?~1456) 등의 의견을 김종서가 동궁을 통해
세종께 아뢰어 그 윤허를 얻어내니 이로 말미암아 "고려사"는 기전체로
기술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이날 예조에 전지하여 함길도 변경의 일과 왜인과
야인을 접대하는 일은 우찬성 김종서와 의논하여 시행하라는 특명을 내려
군사 외교 문제에 관한 전권을 김종서에게 위임한다.

세종은 자신의 정신이 혼미해질 때를 대비하여 김종서에게 이렇게 큰
책임을 모두 맡겨 국정의 혼란을 막으려 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세종의 이러한 우려는 세종 자신에게서부터 기인할 새도 없이
엉뚱하게 명나라의 철없는 어린 황제의 불장난으로 현실화되고 만다.

당시 명나라 황제이던 영종 (1427~64)은 23세밖에 안된 애송이였는데
9세에 등극하여 황태후의 수렴청정 속에서 성장한 철부지였다.

그래서 친정을 하게 되자 영웅심이 발동하여 이해 7월11일 달단의
와랄야선이 산서성 대동을 공격해오자 이를 몸소 정벌하겠다는 만용을
부려 7월16일에 친정에 나서는데 8월13일 야선군의 역습으로 전군이
괴멸당하고 8월15일에는 토목보에서 포위되어 수십만 군사를 잃고 포로가
되는 한심한 일을 당한다.

이로써 명나라는 만리장성 이북과 요하 이서의 땅을 모두 달단에게
빼앗기니 수도인 북경이 적침에 노출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8월17일 이 소식을 들은 명나라 조정에서는 시강 서정 등을
중심으로 남경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기도 하나 병부시랑 우겸이 북경의
고수를 강력히 주장하고 북경 유수를 맡고 있던 황제 성왕이 8월18일
황태후의 명을 받들어 감국이 되었다가 9월 6일 즉위하여 겨우 위기를
넘긴다.

조선에 이 소식이 전해지는 것은 8월1일이었다.

통사 이유덕이 요동에 가 있다가 야선의 군대가 7월20일 요서의 광녕을
침략한 사실을 급보로 알려왔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이런 급보를 받은 조정에서는 의정부 대신과 병조 제신들을
즉시 소집하여 그 방비책을 논의하게 하니 국방외교의 제반사에 전권을
위임받고 있는 김종서가 수반이 되어 그 방비책을 강구하게 된다.

그래서 8월2일에는 통사 김자안과 강문보를 요동으로 보내어 사태를
정확하게 정탐하게 하고 평안도와 함길도의 양계 관찰사와 도절제사에게
글을 내려 변방 경비를 강화하게 하며 장재가 있는 이징석 이징옥 형제를
역마로 불러올리게 하고 기타 무재가 있는 박이녕 하한 등을 기복시킨다.

그리고 김종서 자신은 평안도 도절제사가 되어 적침을 제일선에서
저지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는다.

이때 김종서는 67세의 노인이었지만 이런 중책을 조금도 회피하려
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며 그 우국충정을 과시한다.

"신이 나이는 늙고 재주는 용렬하나 감히 성상의 뜻을 몸받아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세종은 김종서를 내전에서 인견하고 활과 화살 및 칼을 내려준후
다음날인 8월3일 평안도 임지로 떠나 보내는데 의정부에 잔치를 내려
송별하고 동부승지 김흔지를 보내어 모화관에서 전별하게 한다.

8월12일에 요동에서 통사 김자안이 광녕 소식을 전해 오고, 8월18일에는
강문보가 돌아와 보고하는데 황제가 친정한다는 소문이 있고 변경의
경계가 조금 풀어진 듯하다고 한다.

8월19일 통사 김행의 요동 탐문 보고의 내용은 명나라 황제가 7월17일
거용관을 출발하여 대동성에 이르렀고 달단이 패해 달아났으며 8월18일에
회가했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모두 확실치 않은 정보이거나 잘못된 정보였다.

명나라에서 혹시 조선이 달단과 내응하여 명을 협공하지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황제의 친정 사실이나 포로가 된 사실을 숨기고 거짓
정보를 흘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명나라에서는 9월6일 경제가 등극하고 나서야 조선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요동지휘사 왕무를 사신으로 보내어 황제의 피로 사실을 숨긴채
북원의 잔당인 탈탈불화를 정벌하려 하니 군사 10여만을 모아보내어 요동
군사와 함께 이를 협격하라는 칙서를 전한다.

세종은 이를 군사기밀에 속하는 일이라 하여 숨기고 발표조차 하지
않았다.

조선이 영종의 피로 사실을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8월27일에
하성절사로 명나라에 갔던 정척 (1390~1475)이 이 사실을 정확하게
탐문하고 돌아오다가 9월29일 요동에 이르러 급히 보고하면서 부터이다.

이에 세종은 크게 놀라 하등극사와 진위사를 파견키로 하고 더욱 명과
야선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며 변경의 경계를 강화해나가니 12월27일에는
요동의 소식을 정탐해서 급속히 보고하는 사람에게는 벼슬과 재물로
상주는 법을 제정하기까지 한다.

세종 32년 (1450) 1월5일 명나라에서는 사은사 김하 (?~1462)가
귀국하는 편에 지원군 대신 군마 5천필의 공급을 요청한다.

세종이 이를 허락하자 조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명나라에서는 윤
1월1일 시문에 능한 문사인 한림원 시강 예겸을 정사로 보내어 조선의
문사들과 시문으로 사귀게 하니, 예겸은 집현전 학사들인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등과 시문으로 화답하며 우의를 다지고 안평대군의 글씨에
매료되어 이를 다량 구득하여 돌아간다.

이때 이들이 주고 받은 시문은 "황화집" 50권 15책 속에 남아 있고
예겸은 뒷날 "조선기사" 1권과 "요해편" 4권을 남긴다.

야선은 영종을 포로로 한 뒤 명나라 공격보다는 달단의 황제가 되는
일에 혈안이 되어 탈탈불화를 공격하는 일에 주력하였으므로 명과 조선은
야선의 공격으로부터 일단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세종은 평안도 도절제사로 나가 있으면서 많은 방비군을 거느리고
주야로 계엄하느라 편할 날이 없는 김종서에게 2월11일 군사들을 거느리고
상경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68세의 노구를 이끌고 변방 수비를 위해 진충보국하는 노재상의 건강을
염려해서 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김종서보다 14세 아래인 세종이 김종서가 돌아오기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날 줄을! 명나라 황제의 철없는 불장난으로 북변의 정세가 위태로워지자
이를 방비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격무에 시달린 것이 화근이 되어
세종대왕이 갑자기 돌아갔던 것이다.

2월14일 밤 피로로 눕고 나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2월17일에 촛불이
꺼지듯이 홀연 훙서하니 세종대왕은 54세를 일기로 그 찬란한 일생을
마무리짓는다.

그래서 김종서가 불철주야 쉬지 않고 서울로 달려 올라왔을 때는 이미
세종의 육신이 싸늘하게 식은 뒤였다.

그야말로 생리사별이 되었으니 김종서의 애통이 얼마나 크고 깊었겠는가.

2월24일 김종서는 융복의 먼지도 털지 않은 채로 빈전에 쫓아들어가
통곡하고 또 통곡하였으나 세종의 용안은 다시 볼 수 없었고 그 옥음은
다시 들을 수 없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