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사건을 계기로 정부가 "정경유착 근절대책"수립에
나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대기업주들이 외부의 견제없이 그룹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갖가지 비리가
만들어지는 만큼 "오너중심의 경영독주"에 쐐기를 박겠다는 것이다.

지난 14일 이홍구총리가 정경유착 근절책을 이달안에 마련하겠다고 밝힌데
이어 15일엔 청와대의 수석비서관이 같은 말을 했다.

현재 관련부처 사이에서 거론되는 골격은 크게 두가지다.

대기업그룹의 경영에 대한 외부견제기능을 강화하는 것과 불법적 비자금
조성방지를 위해 금융실명제를 보완하자는 것이다.

사외이사제나 외부감사제,기관투자가및 소액주주에 대한 의결권부여, 금융
기관 여신의 출자전환, 그룹기조실 해체, 집단소송제 도입등이 외부견제와
관련된 방안들이다.

금융실명제 보완과 관련해서는 비밀보호 조항을 완화하면서 자금세탁을
불법행위로 처벌할수 있도록 법제화한다는게 주요내용이다.

이밖에 대기업에 대한 접대비 손비인정한도를 줄인다든지, 비자금의 온상인
정부발주공사 제도를 획지적으로 개선하는 방안등이 거론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금융실명제 보완에 대해선 상당히 긍정적인 분위기가
형성돼 있는 반면 대기업에 대한 외부견제장치들에 대해선 대부분의 경제
부처가 부정적인 입장이다.

딱떨어지게 "안된다"는 말은 못하고 있으나 "시기상조"라거나 "현실성이
없다"며 중장기 검토과제로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우선 사외이사제와 외부감사제의 경우 지난 여름 세계화추진위원회와
재정경제원이 검토하다 일단 유보시킨 사안이다.

이번엔 그때와는 여건이 달라진게 사실이지만 재경원 실무자들의 견해는
다름이 없다.

상근인 사내이사와는 달리 비상근인 사외이사는 경영감시기능이 미약하고
오히려 경영에 방해가 되는수가 많다는 미국의 예를 들고 있다.

회사경영상태에 대한 지식과 전문성미비로 효과를 못보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정부투자기관에 이미 사외이사제를 운용하고 있으나 유명무실
하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재경원 일각에서는 내부이사회를 활성화하는 대안을 거론하고 있기도
하다.

소액주주와 고객대표의 이익을 대변하는 상근이사를 주총에서 선임토록
하자는 대안이다.

그러나 기업마다 대주주와 소액주주의 지분율이 다르고 경영간섭이라는
기업의 반발도 예상돼 현실적으로 의미가 있을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기관투자가에게 의결권을 주고 소액주주들도 경영에 참여할 수 있게 하자는
논의에 대해서도 재경원의 반응은 신퉁치 않다.

은행과 증권사가 주주권을 행사할 경우 어지간한 중견기업은 대기업소속
금융기관의 지배하에 놓이는 부작용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또 덩치가 어마어마한 대기업의 경영상황을 금융기관이 파악하고 의사결정
에 개입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무리이기도 하다.

여기에다 기업의 경영책임을 결과적으로 금융기관이 지게되는 결과가 돼
금융기관들도 적극적이지 않다.

소액주주들은 의견취합 자체가 어려운게 현실이다.

최근 거론되는 방안중에 조만간 이행될 가능성이 높은 방안은 기업에 대한
회계감사가 적절히 이루어지도록 감사인제도를 강화하는 방안이다.

회계장부를 조작해 비자금을 마련했는데도 이를 제대로 적발해 내지 못한
외부감사인(공인회계사)은 엄중한 처벌을 받게 하는 한편 이런 우려가 있는
기업엔 공인회계사를 기업이 직접 선임하지 못하게 하고 증권관리위원회가
직권으로 선정하도록 하는 현행 지정감사인제도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그동안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던 실명제보완도 "적극 검토"로
돌아섰다.

너무 엄격하다는 지적을 받아온 비밀보호조항을 완화해 금융기관직원이
불법자금의 거래사실을 사법기관이나 감독당국에 고발할 경우는 비밀보호의
예외로 인정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또 돈세탁방지장치도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별도의 입법을 하든 기존 형법에 처벌조항을 삽입하든 돈세탁행위를 범죄
행위로 규정해 형사처벌을 받게 한다는 것이다.

이를위한 실명제긴급명령 대체입법론도 거론되고 있다.

이른바 정경유착 방지대책이라는게 "성층권"의 지침일 뿐 아직 구체화된게
아니어서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는 두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전직대통령이직권을 남용한 불법행위 문제가 기업의 비리로
뒤바뀌어 공연히 기업활동만 얽어매는 결과는 되서는 안된다는게 경제계의
이구동성이다.

< 안상욱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