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해 기념 세계환경조각전이 서울 하얏트호텔 정원에서 열리고 있다.

국내의 한 화랑이 어려운 절차를 밟아 외국의 대형조각들을 운반해 마련한
전시회이다.

매스컴에 따르면 환경조각은 이래야 하고 이런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환경
조각임을 알리는 행사인 듯 전해진다.

그동안 우리 주변에 세워진 크고 작은 환경조각에 대한 반성의 계기를
제시하는 것같기도 하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살피면 이는 어디까지나 외국조각을 우리 환경조각무대
에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위한 몸짓으로 보여진다.

문화개방에 따라 외국조각가의 작품을 국내의 환경조각으로 설치하는데
목표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세계화가 국가적 목표의 하나가 되고 있는 현실에서 문화쇄국주의를 주장
하자는 것이 아니다.

세계유명조각들이 우리의 미술관을 채우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 됐고
문화개방 또한 낯선 현상이 아니다.

공식적으로 개방되지 않고 있는 일본 대중문화의 경우도 실제로는 거부의
둑을 넘은지 오래이다.

외국의 유명조각이 우리의 건물주위에 설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일정규모 이상 건물에 미술품을 설치토록 한 문예진흥법이
어떤 취지와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와 미국의 문예진흥법이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환경미술품 설치법이 외국조각가를 후원하고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은 분명
하다.

그런데도 우리의 환경조각이 외국작가의 작품에 의해 채워진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문화란 민족에 따라 특성이 따를 뿐만 아니라 지역과 인종에 따라 바탕과
기준이 모두 다르다.

국토의 식민화는 철저히 거부하면서 문화의 식민화에 대해서 그렇지 않은
것은 무엇때문인가.

너그러움인가 판단을 못하는 것인가.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