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 신영복씨(54.성공회대 교수)의 첫 서예전이 17~26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학고재(739-2937)에서 열린다.

주제는 "손잡고 더불어" 독특한 서체의 한글과 한문, 문인화
50여점이 출품된다.

신씨는 경남밀양 태생으로 일찍이 한학자인 조부로부터 글씨를
배웠다.

서울대상대 재학시절 이미 주위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각종행사의
안내문이나 플래카드 글씨를 썼다.

당시 설립된 서울대상대부설 한국경제연구소의 목각현판도 신씨의
작품.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서예에 몰두하게 된것은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 출강하던 68년 통혁당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옥중생활을 하게되면서부터. 투옥중 한학과 서예로 널리
알려진 노촌 이구영, 정향 조병호, 만당 성주표선생에게 사사하면서
자신의 서체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오랜세월 서예에 정진하면서 전서와 해서는 물론 한글궁체까지 두루
썼지만 특히 "민체"혹은 "연대체"라는 이름의 독창적인 흘림체를
만들어낸 것.

그가 새로운 글씨체를 개발한 것은 내용에 따라 기존의 궁체나 고체로
써서는 어딘지 어색한 것이 많다는 생각때문. 민요나 시의 경우 궁체나
고체로 쓸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했다는 설명이다.

"민중시에 궁체"라는 모순때문에 오랫동안 고민하던 그에게 돌파구를
마련해준것은 칠순노모가 두루마리에 한자한자 써보내준 모필체 서한
이었다고.

서민들의 소박한 정취가 그대로 녹아있는 어머니의 글씨체에 주목,
독창적인 서체를 만들어 낸 셈. 때문에 그의 글씨는 기존의 정형화된
서체와 달리 매끈하거나 세련된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이 특징. 다소
거칠고 투박한 느낌때문에 아마추어리즘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정형화된 기존의 서체를 탈피, 소탈한 아름다움과 서민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고유서체를 창조한 작업은 의의가 큰 것으로
여겨진다.

출품작중 "함께가자 우리" "더불어 한길" "솔아 푸르른솔아" 등에서
드러나듯 그의 한글서체는 획의 굵기가 일정치않고 필세의 리듬변화가
심하다.

낱낱의 점획은 하나의 필세로 구성돼있지 않다.

따라서 보는이들로 하여금 빠른 움직임속에 강한 힘을 느낄 수 있게
한다는 평을 받는다.

미술평론가 유홍준씨는 "신씨는 자신이 전하려한 내용을 고체나
궁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음을 느끼고 새로운 형식을 찾아 민체를
완성했다"며 "그는 그림에도 대단히 뛰어난 솜씨를 보여 삶과 역사에
대한 강렬한 의식을 담은 우리시대의 살아있는 문인화를 완성했다"고
평했다.

< 백창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