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총이 임금가이드라인을 포함한 노.사.정간의 사회적 합의를 내년도
부터 추진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큰 충격을 던지고 있다.

중앙단위의 사회적 합의는 매년 단위노조 임금교섭의 준거가 되는 임금
가이드라인과 정책개선을 마련하는 제도이다.

93,94년 두차례 실시된 노총과 경총간 사회적 합의는 임금억제의 수단
으로 악용돼 왔다는 재야 노동계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전국 단위사업장
에서의 임금교섭에 따른 혼선을 줄이는데 크게 기여해온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 제도가 갑자기 폐기된다면 문민정부 출범이후 노총.경총간
임금가이드라인에 의존해온 정부의 임금정책은 대대적인 수정이 불가피
해지고 당장 내년도 단위사업장의 임금교섭에도 큰 혼란이 빚어질 것이
뻔하다.

노총이 이처럼 갑자기 강경노선으로 급선회하게 된 표면적 이유는
정부가 고용보험제 도입과 관련,당초 적용대상을 근로자 30인이상
사업장으로 했다가 최근 기업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를 축소
추진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반발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지난 13일에 있은 전노대등 비노총계열
재야 노동단체들의 제2노총설립결의에 자극됐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국내 노동운동은 올들어 반갑게도 그 흐름이 크게 바뀌는 양상을
보여왔다.

종래의 과격한 정치투쟁성격을 벗어나 본래의 영역으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조짐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치열한 경제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사가 함께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오고 있다.

세계 노동운동의 흐름이 이처럼 갈등과 대립보다는 신뢰와 화합으로
큰 줄기를 잡아가고있는 터에 우리의 노동계는 양분돼 자칫 노.노싸움에
휘말려 6.29선언직후의 혼란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불러 일으키고 있음은 심히 유감스런 일이 아닐수 없다.

우리는 노동운동이 그때 그때의 정치적 상황이나 시유에 휩쓸려서는
안되며 뚜렷한 목표와 원칙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그 목표는 이념이나 정치투쟁이 아니라 근로조건개선 복지향상등에
역점을 두는 실리위주의 경제주의가 돼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노총이 사회적 합의의 일방적 폐기를 선언한 것은 시대적
흐름과 대다수 국민의 말없는 여망에 역행하는 너무 성급한 처사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세계무역기구(WTO)출범과 더불어 본격화될 경제전쟁을 앞두고 대결구도
로는 공멸밖에 없다는 각성이 노.사.정 모두에 확산됐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