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자리를 세종에게 물려준뒤 서울의 동쪽 교외인 "살곶이벌"에서
수렵을 즐기던 태종이 왕십리와 뚝섬 사이를 갈라놓은 샛강에 다리를
놓으라고 명한것은 세종2년(1420)의 일이다.

그러나 이 다리는 세종의 재원기간 중에는 겨우 교각만이 완성됐다.

그뒤 이 다리가 준공된 것이 성종24년(1493)이 었으나"살곶이다리"
(전관교)가 완성되기 까지는 70여년의 세월이 흐른 셈이다.

"어느 중이 있어서 돌 만석을 캐다가 큰 내물 가로질러 다리를
놓았는데 그 길이가 300여보나 되었으며 튼튼하기가 집덩이 같아서
건너다리는 사람이 마치 평지를 밟는것 같았다" " 제세화"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있고 성종이 이 다리가 반석같이 탄탄하다 하여 "제반교"라고
이름지어 친필을 내렸다는 사실도 덧붙여 놓았다.

또 이 다리를 놓은 중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도 실려있다.

당시 사람들이 "자비승"이라고 불렀다는 이중은 대신들이라 할지라도
면전에서 이름을 마구 불렀고 구걸하는 이가 있으면 가진것을 모두
주어버렸다.

종일 일하다가 해가지면 어디론가 바쁘게 떠나가므로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 "여승방으로 내 바지를 찾으로 가네"라고 대답해 묻는이를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그는 금강산과 오대산에서 10년공부를 했으나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서
"달리 나라에 이받이 할 길이 없어 다리나 길이나 우물을 손질하면서
사람들에게 공덕을 베풀고자 할뿐"이라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이런 그의 행적이나 말로 미루어보면 "살곶이다리"건설에 쏟았을
그의 노력과 장인정신의 일단을 엿볼수 있다.

"살곶이다리"(사적제160호)는 조선시대의 가장 규모가 큰 다리로
5백년동안 끄떡없이 지금도 그자리를 지키고 있다.

길이 78개 너비6m인 이 다리는 강바닥에 놓인 주초석에 가로로4개,세로로
22개씩이나 되는 돌기둥을 박고 3장씩 받침목을 건너지른뒤 그위에
대청마루를 깔듯 긴 시령돌을 깔아 통로를 만든 이른바 가교형식의
다리다.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교각을 마름모꼴로 다듬은 것은
옛사람의 지혜를 보였다.

구성의 면밀함과 균형,석재의 장대하고 질박함이 조선전기 토목기술의
장중함으로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살곶이다리"가 빤히 바라다보이는 곳에 초현대식공법을 써서 건설했다는
성수대교가 "대교"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15년만에 동강나 인명피해까지
내는 참극을 빚었으니 500년전 "살곶이다리"를 돌로 짜맞추어놓은
"자비승"에게 무엇인가 다시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