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기업인·기술자가 뛸 수 있게 해야
지난 서너 달 사이에 ‘설국열차’ ‘관상’ 같은 한국 영화가 각각 1000만명 가까운 관람객을 동원했다. 최근 개봉한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는 품격이 단연 돋보인다. 이들 영화에는 경제학적 내용도 있다.

설국열차는 혁명 이야기다. 인류가 기후변화를 잘못 다뤄서 다 멸망하고 어느 탁월한 지도자가 만든 열차에 탄 사람들만 남게 됐다. 그 안에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있다. 뒤 칸의 피지배계급은 짐승 같은 생활을 하는데 앞 칸의 지배계급은 온갖 호사를 누린다. 피지배계급이 반란을 일으켜 성공 직전까지 가지만 결국 열차 자체가 폭파되고 만다.

관상은 쿠데타 이야기다.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위세력인 김종서 등 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잡는다. 이 사태의 본질은 과거 이성계가 고려 귀족들에게서 뺏은 토지를 조선의 사대부들이 다시 나눠 갖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 이성계처럼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이 없다면 ‘정통성’이 명분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에 등장하는 관상쟁이와 한명회 중 누가 ‘정의’의 인간인지는 자명하다. ‘성공한 쿠데타’라 하더라도 그런 문제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설국열차와 관상은 둘 다 농업사회에 대한 이야기다. 관상의 무대인 조선이 농업사회였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설국열차 그 자체는 첨단기술의 산물이지만 열차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열차 안 세계는 19세기 초 토머스 맬서스가 본 농업사회와 마찬가지다. 농업사회에서는 인구 증가만큼 파이가 늘지 않는다. 그만큼 불평등은 고통스럽다. 피지배계급의 반항은 혁명으로 이어지지만, 혁명은 성공하는 경우가 드물고, 성공하더라도 지배계급이 바뀔 뿐이다.

설국열차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물은 송강호가 연기하는 기술자다. 그는 바깥세계를 관찰하고 열차 밖으로 나가는 것이 해법이라는 것을 안다. 열차 밖으로 나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산업화다. 인류는 산업화 이후에 비로소 누릴 수 있는 파이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됐다. 농업사회의 비참한 하층민을 구제한 것은 혁명이 아니라 산업화다.

화이는 현대 한국의 조폭 이야기다. 한국의 경제·사회 현실을 보여주는 측면도 있다. 현대 한국은 산업화를 통해 파이가 급속히 커진 국가다. 그러나 산업화가 ‘정의’의 문제까지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산업화 과정에서 정의의 문제가 나타나는 것은 대개 산업화 자체 때문이 아니다. 산업화는 과학·기술과 기업의 힘으로 가능해지는 반면 정의의 문제는 국가의 존재에 따르는 정경유착이나 부패에서 온다. 화이에서는 건설회사와 권력의 유착에 조폭이 끼어든 구도다. 여기서 건설이 등장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나라에서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건설은 중요한 부문이 됐다. 건설은 도시계획과 결합돼 권력과의 유착이나 부패가 일어나기 쉬운 산업이다. 부동산 투기의 원천으로서 불평등한 분배의 바탕이 됐고, 지금도 재개발 사업 등으로 서민층과 중산층의 재산권을 침해하곤 한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건설 같은 곳에서 자원을 빼서 새로운 성장 동력에 투입하는 것이 해결책이다. 더 넓게는 정경유착과 부패의 구도를 줄이고 과학·기술자와 기업가가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국열차에서의 송강호처럼 상황을 제대로 살필 줄 아는 인물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같이 산업화된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난 적은 없다. 정치가 민주화돼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한국이 ‘정의’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설국열차, 관상, 화이 같은 데에서 나타나는 인식 세계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 바뀌지 않으면 한국 경제·사회 수준은 한국 영화 수준만큼 올라갈 수 없을 것이다.

이제민 < 연세대 경제학 교수 leejm@yonsei.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