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팀장 휴가 가면 '또 다른 휴가' 겹치는 날 피하자…피말린 제비뽑기
본격적인 여름 휴가 시즌이 돌아왔다. 예년보다 일찍 찾아온 찜통더위로 몸과 마음이 지친 지금 휴가가 더욱 절실해진다. 오늘도 상사의 눈을 피해가며 가족 혹은 연인과 언제, 어디서, 어떻게 휴가를 보낼지 인터넷을 뒤지는 김과장, 이대리들. 하지만 돌이켜보면 여름 휴가는 계획을 세울 때가 가장 행복하기 마련이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처럼 예기치 못한 변수로 회사에 있는 것보다 못한 휴가를 보내고 오는 사례도 적지 않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휴가지에서 사이가 껄끄러운 직장동료를 만나는가 하면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호텔방 안에서 노트북을 열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골치 아픈 업무와 상사로부터 해방돼 ‘진정한’ 휴가를 보내려는 직장인들의 노력이 눈물겨운 시기다.

○팀장 휴가 땐 팀원은 ‘어린이날’

한 대기업 영업팀 직원들은 얼마 전 ‘피말리는’ 제비뽑기를 했다. 휴가 일정을 짜면서 상사와 겹치는 날에 누가 갈 것인가를 정하는 자리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A씨는 마음 속으로 주기도문까지 외웠지만 운 나쁘게도 상사와 같은 시기에 휴가를 가는 것으로 결정됐다.

휴가를 정하면서 제비뽑기까지 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영업팀장이 평소 직원들을 들들 볶는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팀장이 휴가를 떠나면 남은 직원들이 ‘편안하게’ 회사생활을 할 수 있는데 A씨는 그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됐다. 그는 “팀장이 휴가 가면 남은 팀원들은 우리 세상을 외치는 어린이날이나 마찬가지”라며 “그런 편안함을 맛볼 수 없게 돼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상사의 휴가 시기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다. 주로 막내 직원들이 이런 ‘임무’를 맡는다. 점심시간이나 회식자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알아내는 것이 포인트다. 냉장고 금형 제조업체에 다니는 B씨는 인기 휴양지와 관련된 최신 정보를 상사에게 알려주는 척하면서 정보를 캐낸다. 그는 “처음부터 언제 휴가를 가시느냐고 물어보면 속마음을 들킬 수 있기 때문에 상당한 테크닉이 필요하다”며 “휴가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가지고 얘기해야 상사도 자신의 일정이나 계획 등을 자연스럽게 털어놓는다”고 노하우를 들려줬다.

하지만 상사와 휴가 일정을 엇갈리게 잡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큰일도 아닌데 휴가를 떠난 부하직원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 업무 얘기를 늘어놓는 ‘개념 없는’ 상사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 제작사에서 일하는 C씨는 이런 일을 우려해 여름 휴가는 무조건 해외로 간다고 소문을 낸다. 상사가 전화를 해도 시차와 현지 사정 때문에 못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변명거리를 만들어두기 위해서다.

○시댁, 처갓집은 ‘복병’

휴가를 힘들게 하는 복병은 집에도 있다. 외국계 은행에 근무하는 D씨는 결혼한 뒤 내리 3년을 시댁 식구와 함께 여름 휴가를 보냈다. 남편과 결혼할 때만 해도 시댁이 미국에 있다는 게 큰 장점이었다. 하지만 평소 부모님을 잘 보지 못하는 남편은 여름 휴가 때마다 미국을 찾았다. D씨는 “남들은 해외로 휴가를 떠난다고 좋아하지만 차라리 국내에 남고 싶은 심정”이라며 “부모님을 만나고 싶은 남편 마음도 이해하지만 모처럼 맞은 휴가를 시부모님 모시느라 힘들게 보내고 나면 가끔 눈물도 난다”고 했다.

사위들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 지난 4월 결혼한 새신랑 E씨는 최근 고민에 빠졌다. 장인, 장모님이 여름 휴가를 같이 보내자며 제주도 여행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계획은 E씨가 짜기로 했다. 문제는 항공편과 호텔 등을 예약하는 데 300만원가량의 비용이 들어간다는 것. 혼자 떠안기엔 버거운 액수다. 하지만 명색이 맏사위인데 장인, 장모님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 차마 “‘비용을 N분의 1’로 나누자”는 얘기를 할 수 없었다. 그는 “아내가 섭섭해할까봐 의논도 못하고 속만 태우고 있다”고 털어놨다.

○사내연애, 여름 휴가로 들통날 수도

백화점에 다니는 1년차 대리 F씨와 G씨는 입사동기로 사내 연애 중이었다. 다른 지점에 있다가 우연히 같은 지점으로 옮긴 지 1년 가까이 됐다. 두 사람의 연애가 발각된 건 여름 휴가 때문이다. 평소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하던 인사부 과장에게 딱 걸린 것. 과장은 두 사람의 휴가 일정이 같은 날 시작해 같은 날 끝나자 특유의 ‘촉’이 발동했다. 두 사람의 과거 휴가 사용 실적과 연월차 사용내역을 살펴본 뒤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후 둘의 연애는 사내에 알려지게 됐다. “매번 여행을 같이 갔다더라”는 소문은 “사실혼 관계라더라”고까지 확대 재생산됐다. 두 사람은 일이 이렇게 된 김에 결혼을 서두르기로 했고, 현재 알콩달콩 신혼 재미를 느끼고 있다.

여자친구(여친) 몰래 휴가를 다녀와 이별한 아픔도 있다. 식품 제조업체에 다니는 H씨는 지난해 여자친구에게 해외출장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친구들과 몰래 2박3일 일정으로 부산 해운대로 여행을 떠났다. 친구들과 해변가에서 자연스럽게 ‘헌팅’에 나선 H씨는 갑작스럽게 여친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지금 어디냐”는 여친의 날카로운 질문에 “해외 출장 간다고 하지 않았느냐. 곧 회의가 시작되니 빨리 끊자”고 둘러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친으로부터 ‘헤어지자’는 짧은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알고보니 해변가에서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에게 기웃거리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여친의 회사 동료가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보낸 것. H씨는 “사태가 그렇게까지 커질 줄 몰랐다”고 후회했다.

○‘혼자 여행 간다’는 말은 금물

새내기 직원이라면 “혼자 여행 간다”는 말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노총각·노처녀 상사들이 “함께 가자”는 얘기를 할 수도 있어서다. 회계법인 입사 1년차인 I씨는 최근 부장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인터넷으로 저가 항공권을 찾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옆자리 선배가 “같이 가자”고 한 말을 농담인 줄로만 여겼다. “좋죠”라고 건성으로 대답한 게 화근이었다.

I씨는 결국 선배의 항공권과 숙소까지 알아봐야 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판이 점점 커지더니 옆 부서 선배 둘도 덩달아 끼게 됐다. I씨는 선배 3명과 함께 해외로 여름 휴가를 가게 됐고, 다녀와서 몸살을 앓았다. 통역부터 길찾기, 음식 주문, 입장료 계산까지 모든 잡일을 떠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뒤로는 누가 물으면 무조건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 간다고 말한다”고 씁쓸해했다.

전설리/박신영/황정수/강경민/박한신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