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鄭奎載) <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

5년 만의 새해다.

충심 어린 덕담(德談)들이 오고 간다.

역시 민주주의는 이래서 좋은 모양이다.

정권을 교체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고 희망은 실현되었다.

그러나 덕담은 오래 가면 좋지 않은 법이다.

새 정부가 내놓았던 잘못된 덕담의 하나는 '실용 정부'라는 말이었다.

인수위가 이 고약한 단어를 쓰지 않기로 한 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지만 '국민 화합'이라는 말도 쓸데 없는 오해를 만들기에 충분하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징후가 뚜렷해지기 전에 이를 바로잡는 것이 좋다.

인수위는 정부 앞에 문민이니 참여 따위를 붙이는 것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기 때문에 실용이라는 단어도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지만 이 단어는 그 자체로 새정부에 결코 맞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실용이라는 단어는 한마디로 소수파가 다수파를 우회하고자 할 때 쓰는 말이지 다수파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 아니다.

더구나 '꿩잡는 것이 매'라는 정체 불명의 단어다.

열린우리당에 편승했던 기회주의 인사들이 고루한 당권파를 극복하고자 했을 때 이 단어를 썼던 것이 대표적인 용례다.

흑묘백묘를 말했던 덩샤오핑(鄧小平)도 홍위병들의 대난동 속에서 이 말을 썼던 것이고 조선의 실학파 역시 골수에 물든 주류 주자학 관념론을 극복하고자 했을 때 실사구시라는 말을 꺼내들었던 것이다.

실용이라는 단어는 일종의 소극적 보신책(保身策)이다.

"한번 잘해보자는 것이었지 다른 뜻은 없었고…"라는 책임 회피적 단어에 불과하다.

미국이 실용주의의 깃발을 들었던 것 또한 거대 유럽의 썩은 관념론을 애써 극복하고자 했던 전략적 언어였다.

새 정부의 실세 누군가가 이 단어를 주창했다면 그는 시대 정신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실용주의라는 말을 썼을 때도 경험론적 바탕과 자유주의의 확고한 원칙 위에 서있었던 것일 뿐,회색지대나 기회주의를 정당화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전폭적인 지지 속에 탄생했다.

실용주의라는 말은 자칫 "원칙은 아무래도 좋다,돈만 벌고 보자"는 천민적 속성의 간판처럼 전락할 가능성만 크다.

그래서 어느 시점엔가 모욕적 단어로 될 수도 있다.

모골이 송연한 상황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념에 찌든 참여정부의 반사적 의미로야 그럴싸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왜,썩은 친북 이념과 홍위병 따위를 연상케 하는 참여정부의 반사적 의미로 자리를 매겨야 하는가 말이다.

기실은 새 정부에 이런저런 닉네임을 붙여야 할 이유부터가 없는 것이다.

그냥 이명박 정부 하나면 족하다.

김대중 정부가 '대중'이라는 말을 내걸기 눈치보여 국민이라는 모호한 말을 썼던 것이고 노무현 정부가 포퓰리즘을 적당히 버무리기 위해 '참여'라는 말을 차용했던 것인데 그것을 흉내낼 이유가 없다.

실용정부 따위의 이름을 붙이려는 것부터가 비실용적이며 콤플렉스에 전 행동 양식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이 정체불명의 이름을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

국민 화합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누가 이런 단어를 주장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 역시 소수정권이나 하는 말이지 다수파 정권이 입에 올릴 단어가 아니다.

김대중 정부가 JP와 비열한 지역연합을 통해 정권을 잡았을 때,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행정수도로 특정지역을 매수한 다음, 김대업을 내세워 국민을 속이면서 정권을 잡았을 때나 국민화합을 말하는 것이지 이명박 정부가 이 단어를 입에 올려야 할 이유는 없다.

실용이나 화합이라는 말을 내세워 당선자 주변에 정체불명의 기회주의자들이 득실댈 것이 벌써부터 걱정된다.

시장경제가 진흙탕을 굴러도 좋다는 천민사상이 아니거니와 국민화합이라는 명제 또한 노선의 잡탕을 허용하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잘못 설정된 실용과 화합은 시장의 도덕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벌써부터 당선자 주변에 구름처럼 몰려드는 허접한 정상배들의 기회주의적 공간만 만들어낼 뿐이다.

그러니 그럴싸한 말이라고 함부로 내걸지 말라.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