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 경제연구소장ㆍ논설위원 > 언젠가 백기완씨는 "버스가 오른쪽으로 획 돌아가면 승객의 몸은 왼쪽으로 쏠리게 된다"며 자신에 대한 좌파 시비를 익살로 받아쳤었다. 그의 말마따나 좌우의 문제는 곧 시대의 문제다. 최근의 프랑스 학생시위에 대해 파이낸셜타임스가 "바리케이드의 반대편에 서있다"며 이념 정체성을 비난한 것도 비슷한 경우다. 엊그제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는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실로 뜨악한 주장을 내놓았다. 정부의 무소신, 무정견을 변호하려는 것에 불과할 테지만 실로 고약한 조어법이다. "우리가 좌파 정책한 것이 무엇인지 말해보라"며 열을 올리던 그간의 태도를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지금에 와서 좌파라는 고백의 변을 대통령의 '진술서'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굳이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병용해서 쓰자면 '전향서'도 함께 제출하는 것이 순서에 맞다. ('전향서'라는 어처구니없는 단어를 쓸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달라) 대통령의 언어 공간에 좌파나 신자유주의 따위의 대립적 단어들 밖에 없으니 국민들의 귀는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더구나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식의 자기푸념적 화법을 언제까지 듣고 있어야 하나. 수험생들이 논술을 쓸 때도 "나는 이렇다" 혹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시작하지 말기를 권하고 있다. 이제 막 '개념'을 배우기 시작한 사춘기 소년들이 흔히 쓰는 소아병적 화법이 아니던가 말이다. 물론 이념 논쟁을 전적으로 공론(空論)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신자유주의 과잉은 오늘날 한국의 금융시장을 보더라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외환위기 와중에서 팔아먹을 것은 다 팔아먹은 결과지만 "봐라 이것이 신자유주의"라고 한다면 이는 오히려 연이은 좌파 정부에 그 책임소재를 물어야 마땅하다. 그것조차 '재벌을 죽이자''기업을 혼내자'며 외통수를 가다 보니 신자유주의의 막다른 골목길로 들어선 것일 뿐 진정성 있는 자유주의 정책의 결과가 아니었던 것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대로다. 개발경제가 키워낸 중심세력은 배제되고 정치권의 좌파들과 기회주의적 관료들,외국은행과 투기자본의 대변인들이 나라경제를 양 극단에서 쥐고 흔들었으니 지난 몇 년간은 좌파와 신자유주의의 '기묘한 대연정'이라고 해야 할 지경 아니었던가. 이제 막 베일을 걷고 있는 김재록 파문도 그런 게 아니던가. 대통령이 이제 와서 신자유주의를 들먹이는 건 소도 웃을 일이고 한ㆍ미FTA를 신자유주의 사례로 든다면 지구상에 신자유주의 아닌 나라는 북한밖에 없다. 자산 양극화만 하더라도 사태를 이 지경으로까지 악화시킨 건 시장원칙에는 귀를 틀어막고 있던 바로 이 좌파 정부다. 항차 이를 정치공세의 무기로 삼는 건 적반하장의 고달픈 노력이다. 이념의 시장에서도 포장과 내용물의 차이는 항용 있는 법이다. 자신의 약점을 상대에 대한 공격의 화두로 삼는 것도 전형적인 정치 화법의 하나다. 행정수도 부동산표에 힘입어 정권을 잡은 정부가 기어이 부동산 문제를 국정 최고 아젠다로 걸 수밖에 없도록 돌아간 저간의 사정도 좌파 세력의 분별없는 열정이 빚어내는 역설(逆說)의 하나다. 잠자는 주인 얼굴에 앉은 파리를 잡자고 앞발을 내려쳐 사람을 죽게 만든 곰이 "파리를 잡으려고 한 것은 좌파적 열정이고 주인을 죽인 것은 신자유주의 양극화"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 곰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노무현 정부를 기어이 '무능 정권'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대통령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좌파 신자유주의 따위의 중의적 언어 유희는 부디 그만두시기를 부탁할 수밖에 없다. 세상 일을 한낱 몇 개 단어에 가두어 둘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데는 어느 정도 정신의 성숙이 필요하다.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