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 속설이지만 어떤 정권도 18년을 넘겨 집권할 수 없다고 한다. 대체로 이 기간이면 집권의 이념도 명분도 시들해진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에서도 대략 16~20년의 이념 주기를 갖는다는 분석들은 정말 그럴싸하다. 김일성이나 카스트로 같은 예외들이 있지만 정상 국가라면 분명 그보다 짧을 수밖에 없다. 박정희의 18년 집권도 절묘한 주기를 맞추고 있고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따지면 민주화 운동 정권도 벌써 15년을 채워가고 있다. 6월 항쟁으로 따지면 이미 18년이다. 그만하면 집권 세력의 상상력이 밑천을 드러낸다는 말도 된다. 시간의 흐름은 우리가 그 시대에 호의적이건 적대적이건 그만큼 빠른 모양이다. 그렇게 따지면 머지않아 새로운 변증의 시기가 다가올 테고…. 좀 다른 이야기지만 미 대법원장 랜퀴스트가 19년 종신직을 마감한데 이어 앨런 그린스펀 미 연준리(聯準理:FRB) 의장도 오는 연말이면 물러난다. 이념의 추(錘)가 한 주기를 왕복할 만한 기나긴 재임 기간들도 이렇게 끝나간다. 그린스펀은 무려 18년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그래서 외풍도 만만치 않은 자리를 버텨냈다. 레이건에 의해 임명돼 아버지 부시와 클린턴과 아들 부시에까지 그는 '의장!'이라는 친숙한 직함으로 불렸다. 물론 이것이 신기록은 아니다. 지난 51년부터 70년까지 19년을 역시 '의장!'이라고 불린 사람도 있다. "파티가 끝나기 전에 펀치볼(파티용 큰 그릇)을 치워야 한다"는 명언을 남겼던 윌리엄 마틴이다. 앨런 그린스펀이 월스트리트의 이상과열을 경계하면서 했다는 이 말은 실은 전임자의 전매특허다. 미국 언론들이 때이르게도 '고별사'라고 불렀던 그린스펀의 마지막 연설이 며칠전 와이오밍주 잭슨홀에서 있었다. 여기서 작성된 것이 소위 '그린스펀의 10계명'이다. 후임자에게 주는 그의 계율은 "스스로를 지적 속박에 가두어 놓지 말라"는 언명으로 시작된다. "규칙에 얽매이지 말고, 과신하지 말며, 함부로 정책을 뒤집지 말고…"로 이어지는 이 10가지 계명이 비단 중앙은행 총재가 지켜야 할 덕목인 것만은 아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 10계명을 다시 3대 강령으로 정리했다. -정부를 의식해 금리를 운용하지 말라. -인플레이션(물가) 수치 목표는 잊어버려라. -주식과 부동산 가격을 예측하려 들지 말라. 물론 미국과 세계 경제를 주물러왔던 구루(Guru)의 18년 지혜를 한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는 없다. 워싱턴 사교가의 황제로도 불렸던 사람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절묘한 언어의 저공비행을 아무나 흉내낼 수도 없다. 그러나 "자산 가격을 예측하지 말라" "회의적이 되어라" "물가 목표는 잊어라"는데 이르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고 깜짝 놀라 눈을 씻고 다시 보게된다. 그가 지금 한국의 당국자들에게 굳이 이말을 들려주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회의는커녕 부동산 가격에까지 가이드라인을 내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확신이요 과신의 한국이다. '지적 속박'이라는 표현만 해도 그렇다. '지적'(知的)이라는 단어조차 부끄럽게도 온갖 과격한 정치적 슬로건들이 경제정책의 앞머리에 떡하니 매달려 있지 않은가 말이다. "금리 인상은 불가"에 신념의 뿌리를 내려놓고 있는 한국은행도 마찬가지다. 한은 독립의 편협주의는 기어이 물가를 수치 목표로 만들어 놓은 지 벌써 몇 년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거창한 10계명 따위는 비교조차 난감해지고 만다. 계명은 둘째 치더라도 정부 당국자들이 이렇게도 미꾸라지에 소금 뿌린 듯해서야 나라 경제가 될 턱은 있을 것인지….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