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는 지난 7월 기후 리스크를 재무제표에 반영하는 방법을 돕기 위해 ‘기후 관련 사례를 사용한 재무제표의 불확실성 보고’ 예시 초안을 공개했다. IASB의 핵심 철학은 새로운 회계기준을 제정하기보다 기존 IFRS 기준을 충실히 적용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데 있다. 이 때문에 법적 구속력이 없는 예시 형태를 택했으며, 시장에 신속하고 실용적인 가이드를 제공하겠다는 목적을 밝혔다.
이번 초안은 기후 리스크를 주요 사례로 다루면서도 그 원리는 모든 유형의 중대한 불확실성 공시에 적용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즉 기후라는 가장 복잡하고 중요한 주제를 통해 ‘불확실성 공시’의 모범 답안을 제시한 셈이다. 예시는 감가상각, 손상 등 숫자가 어떤 기후 관련 가정과 분석 위에 서 있는지를 투명하게 연결하도록 요구한다. 10월 최종본이 발행되면 기업들은 이 틀을 활용해 기후 관련 정보를 더욱 체계적으로 공시하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기후 관련 공시(IFRS S2)에 따라 지속가능경영 보고서에 기술된 기후 전략과 리스크는 IASB의 가이드를 통해 재무제표의 자산 손상, 충당 부채 등 구체적 숫자로 재무적 결과가 증명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업들은 지속가능경영 보고서와 재무제표가 하나의 논리로 일관되게 설명되는 이러한 통합 기준을 통해 기후 관련 정보를 보고해야 한다.
기후 리스크가 재무제표를 바꾸는 메커니즘
IASB의 지침은 기후 리스크가 기존 회계기준의 틀 안에서 기업의 자산, 부채, 손익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키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 경로를 제시한다.
글로벌 기후 공시 동향과 한국의 과제
글로벌 회계 표준이 구체화되는 동안 주요국은 기후 공시 의무화를 향해 각자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가장 먼저 강력한 기업지속가능성 보고지침(CSRD)을 도입한 유럽연합(EU)은 최근 제도의 복잡성을 완화하며 ‘정비’에 나서고 있지만, 미래를 대비한 정교화 과정에 가깝다. 공시 항목의 양적 부담을 일부 줄여주는 대신 데이터의 질과 비교가능성을 높여 제도의 실효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적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미국은 연방 증권거래위원회(SEC) 규칙이 법적 불확실성으로 잠시 보류된 상태지만, 세계 5위 경제 규모의 캘리포니아주가 SB 253(배출량 공시)·SB 261(기후 리스크 공시)의 단계적 시행을 준비하며, 글로벌 기업에 사실상 준연방 표준 역할을 하고 있다.
호주와 일본은 명확한 로드맵으로 빠르게 전진하고 있다. 호주는 2025년 1월 1일부터 대규모 기업을 대상으로 기후 관련 재무 공시를 시행하며, 초기부터 높은 수준의 외부 보증(assurance)을 요구해 데이터 신뢰도를 선점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일본의 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SSBJ)는 2025년 3월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 기준을 반영한 자국 공시기준을 확정하고, 시가총액 3조 엔 이상 기업부터 2026 회계연도 보고서에 적용하는 단계적 의무화 방안을 제시했다. 제3자 보증 또한 2027 회계연도 보고분부터 도입을 검토하는 등 구체적 시간표를 시장에 명확히 알리며 불확실성을 해소했다.
반면, 한국은 ‘2026년 이후 단계적 의무화’라는 방향만 정해졌을 뿐 구체적 일정과 범위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하지만 시장은 규제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글로벌 투자자와 공급망 파트너들은 이미 ISSB 수준의 데이터를 요구하고 있으며, 국내 규제 지연은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 기업의 경쟁력 약화로 직결될 수 있다.
이러한 글로벌 동향 속에서 기후 공시는 글로벌 시장에서의 생존과 성장을 위한 ‘필수 과제’가 됐다. 이는 단순히 규제에 대응하는 것을 넘어 기업이 직면한 재무적 불확실성을 관리하고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는 ‘성장의 나침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의 선제적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한국의 과제와 나아갈 길
정부는 ‘2026년 이후’라는 모호한 시간표의 불확실성을 조속히 해소하고, 예측 가능한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 명확한 기준과 일정이 있어야 기업들이 체계적으로 투자하고 준비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다른 국가의 기업과 당당히 경쟁하고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글로벌 표준이 확고해진 지금, 우리 기업은 다음 준비를 통해 경쟁우위를 확보해야 한다.
규제 공백이 준비의 여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글로벌 시장의 시계는 이미 ISSB 표준에 맞춰 돌아간다. 정부의 예측 가능한 로드맵은 기업이 불확실성 속에서 방황하지 않고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는 ‘안전띠’가 되고, 기업의 선제적 대응은 변화를 비용이 아닌 경쟁력으로 전환하는 ‘엔진’이 된다. 두 축이 맞물려야 기후 공시는 부담이 아닌 체질 개선과 미래 성장의 핵심 경로가 될 수 있다. 이제 한국의 기후 공시 시계가 다시 빠르게 움직여야 할 때다.
생존과 성장을 위한 5대 실행 과제: 구체적 실행 방안
① 거버넌스 재정립: 이사회 중심의 책임경영 기후 리스크는 더 이상 ESG 실무팀만의 업무가 아니다. 이사회가 최종적으로 감독 책임을 지고, 경영진은 기후 관련 전략과 재무적 영향을 통합해 의사결정을 내리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사회 내 ‘지속가능성위원회’를 신설하고, 위원회는 신규 공장 설립처럼 회사의 중대 투자 안건에 대해 기후 시나리오와의 정합성 및 탄소감축 목표에 미치는 영향을 의무적으로 검토한다. 최고재무책임자(CFO)는 매 분기 이사회에 기후 리스크의 재무적 영향 분석 결과를 보고하고, 이를 경영 계획에 반영한다.
② 데이터 거버넌스 구축: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 확보 공시 정보의 신뢰성은 데이터에서 나온다. 재무 데이터 수준의 엄격한 관리 체계를 비재무 데이터에도 적용해야 한다. 데이터 출처부터 최종 공시까지 전 과정이 투명하게 추적되고 검증 가능해야 한다. 공장의 에너지 사용량 데이터를 ERP 시스템과 연동해 스코프 1·2(직간접배출량)를 자동 산출한다. 외부 감사인이 특정 월의 배출량 데이터 근거를 요청할 경우 해당 공장의 특정 월 에너지 고지서까지 역추적할 수 있는 ‘증빙 경로(evidence trail)’를 시스템상에 구축해 데이터의 감사 가능성을 확보한다.
③ 시나리오 분석 고도화: 전략과 회계의 연결 기후 시나리오 분석을 단발적 보고용 과제로 끝내서는 안 된다. 분석 결과를 실제 자산 손상 검토, 내용연수 추정 등 핵심 회계 추정 과정에 반영하는 내부 지침과 프로세스를 마련해야 한다. 자동차 부품사는 ‘질서 있는 전환’과 ‘무질서한 전환’ 시나리오를 설정한다. 무질서한 전환 시나리오가 발생할 경우 재무팀이 자산 손상(IAS 36) 검토 시 내연기관 부품 생산설비의 내용연수를 5년 단축해 미래 현금흐름을 추정하도록 내부 회계 지침을 개정하고 문서화한다.
④ 금융 리스크와의 통합: 리스크의 계량화 금융기관은 물론 대규모 여신 및 투자 포트폴리오를 운용하는 비금융 기업도 기후 리스크를 기존 신용 및 시장 리스크와 동일한 층위에서 계량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은행은 기업 대출 신용평가 모델에 ‘전환 리스크’ 변수를 추가한다. 시멘트나 철강 등 탄소 다배출 산업에 속한 기업은 자동으로 내부 신용등급이 일부 하향 조정돼 대출 한도가 축소되거나 금리가 가산되는 등 실질적 여신 정책에 반영된다.
⑤ 내부통제 및 보증(assurance) 준비: 감사 가능성 확보 최종적으로 공시 정보는 외부 기관의 검증(보증)을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 데이터 수집, 취합, 검토, 승인 등 전 과정에 걸쳐 책임과 역할을 명확히 하는 내부통제 프로세스를 수립해야 한다. ‘기후 정보 공시 매뉴얼’을 제작해 데이터 항목별 담당자, 검토자, 승인자를 지정한다. 모든 핵심 데이터는 버전 관리가 가능한 중앙 시스템에 저장하고, 수기 조정이 발생할 경우 반드시 승인 근거를 남기도록 해 외부 검증인이 샘플링과 테스트를 용이하게 수행하도록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