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메뉴
  • 경운궁 ‘궁담길’을 걸어보자!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는 왕비의 침실인 옥호루에서 시해를 당한다. 고종은 왕위에 오른 지 32년 만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경복궁을 벗어나 거처를 옮긴다.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돌아갈 수 없는 길, 고종은 경운궁 선원전에서 러시아 공사관이 있는 정동으로 향한다. 길 위에서 길을 찾듯, 왕의 길(King’s Road) 따라 고종과 세자가 추운 겨울 바쁜 걸음으로 러시아 공사관을 향한다. 1896년 2월 11일 아쉽고 서글프지만 법궁을 떠나 아관에 1년 9일간 머문다. 친 러시아 경향인 정동파(貞洞派)가 득세하는 정세다. ‘아관파천’인가? ‘아관망명’인가?   경희궁과 경운궁 사이 정동 언덕배기에서 가장 높은 곳에 공사관이 있다. 러시아 공사관이다. 인왕산이 보이고 백악산도 한 뼘 거리다. 저 멀리 목멱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최고의 위치다. 1890년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로 정동에서 제일 규모가 크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러시아 공사와 미국대리공사의 협조로 아관으로 피신한다. 개항 후 외교의 중심, 정동은 외교의 거리였다. 정동에는 외교관과 선교사, 의사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전통과 근대가 조화롭게 이루어진 개화의 거리, 외교의 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이 넘자 조속한 환궁을 요구하고, 1897년 2월 20일 경운궁(慶運宮)으로 환궁한다.      러시아 공사관 터는 현재 첨탑만 남아있다.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통로가 경운궁과 연결 되어있다. 1897년 10월 12일 경운궁 궁담길 따라 환궁한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다. 세계 각국 각처에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근대 상징인 정동은 대한제국의 중심이 되었다. 정동길은 황제의 나라, 개화의 거리가 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