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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성권
    조성권
    The Life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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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약력
    우리은행 홍보실장, 서여의도지점장
    예쓰저축은행장/대표이사
    국민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이투데이 선임연구위원
    현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소개 글
    20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만큼 살다 보니 그때는 듣기 싫던 잔소리가 나를 이만큼이나 키워준 거란 걸 알았습니다.
    그 지겹던 잔소리들이 모두 고사성어에서 나온 거란 걸 깨달았습니다. ‘아이는 부모 등을 보고 배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불초(不肖)‘라는 고사성어에도 나오듯 아버지를 닮지 못합니다.
    학교 공부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인성이 더없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시집간 딸이 딸을 낳고 장가든 아들이 아들을 낳아 손주가 생기고 나니 손주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은 아버지의 고사성어를 100여 개 추려 잔소리를 회억해냈습니다.
    • 장점으로 단점을 보완하지 마라

      나는 왼발 엄지발톱이 없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버지 재떨이를 들고 동생과 장난치다 떨어뜨려 다쳐서다. 대포 탄피 밑동을 잘라 만든 재떨이는 무거웠다. 검붉은 피가 솟구쳐 나오더니 발톱이 빠진 자리에 새 발톱이 나오지 않았다. 인젠 익숙해졌는데도 발톱 없는 왼발을 볼 때마다 그날이 떠오른다. 상흔(傷痕)이란 게 그렇다. 잊히질 않는다. 양말 벗고 있을 땐 언제나 왼발 위에 오른발을 올려 감추는 건 그때부터 가진 버릇이다. 해수욕장에서는 왼발 위에 모래를 얹어 감추기도 했다. 날이 추우면 왼발 엄지가 유독 시리다. 아버지는 전란 중에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왼쪽 발가락도 새끼발가락을 빼곤 모두 잃었다. 그 새끼발가락 발톱이 파고들어 아플 때면 상처를 입던 그 날의 기억이 되살아나 아버지는 더욱 못 견뎌 했다. 손발톱을 깎던 아버지가 내 손발톱을 깎아줬다. 발톱 없는 왼발 엄지를 한참이나 만져줬다. 그때 뭐라고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다. 몇 년 지나 우리집을 지을 때 똑똑히 알게 됐다. 사연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는 지시한 대로 하지 않자 공사감독인 대목장과 심하게 언쟁을 벌였다. 앉아있던 아버지가 지팡이를 거꾸로 들어 손잡이로 서 있는 대목장 목을 잡아당겨 고꾸라뜨렸다. 그리고는 넘어진 이의 발목을 양손으로 잡아 몸을 뒤집어 무릎을 꿇렸다. 놀랄 틈도 주지 않을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대목장 지휘 아래 집이 완성되었으니 그날 일은 잘 마무리 지어진 듯했다. 그는 멍든 발목을 만지며 손아귀 힘이 무섭다고 엄살을 떨었다. 궁금증은 그날 밤에 아버지가 풀어줬다. “사람 발톱은 피부에서 돋아나는 부속기관이다. 뼈에서 돋아

      2023-02-28 17:53
    • 지식의 바퀴는 클수록 좋다

      아버지 자전거로 타는 법을 배웠다.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아버지가 나갔다 오면 자전거 바큇살까지 윤이 나게 닦는 게 내 일이었다. 틈틈이 타봤지만 쉽질 않았다. 아버지 몰래 자전거 수리도 여러 번 했다. 한참 만에야 용기 내 타고 나갔다. 어머니가 놀라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키가 작아 엉덩이를 이리저리 씰룩거려야 페달에 발이 닿았다. 뒤뚱거리며 시장길을 걷는 것보다 못하게 자전거를 몰았다. 지팡이를 짚지 않은 아버지가 손뼉 치며 좋아라 하시는 모습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점포 앞에 놓인 채소들을 깔고 뭉개며 백여 미터쯤 가다 작은 도랑에 바퀴가 빠지는 바람에 자전거와 함께 옆으로 넘어졌다. 자전거 배워 처음 타던 날 풍경이다. 자전거 핸들을 양옆에서 나눠 잡고 걸어오는 길에 아버지는 큰소리로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아버지에게 자전거는 제2의 다리였다. 6·25 동란에 참전해 오른쪽 다리를 잃은 아버지는 재활훈련으로 어렵게 자전거 타는 법을 다시 배웠다고 했다. 성한 왼쪽 다리 쪽으로 자전거를 기울여 힘없는 의족인 오른발을 페달에 묶고 반 바퀴쯤 밀면서 왼발로 페달을 힘차게 밟아 균형을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재활훈련 지도사가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당신의 균형을 유지하려면 계속 움직여야 한다”며 힘겹게 가르쳤다고 한다. 아버지는 큰 힘이 되는 말이었다고 되뇌었다. 알고 보니 저 말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1930년 2월 5일 아들 에두아르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인생 조언이다.  동네 분들 모시고 잔치를 벌인 그날 밤 손님들이 가시고 나서 알려주신 고사성어가 ‘다다익선(多多益善)’이었다. 마침 아는 글자여서

      2023-02-21 17:30
    • 호기심을 잃지마라

      우물에 빠졌을 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평생토록 잊히지 않아 지키고 산다. 초등학교 다닐 때다. 정확히는 우물 파는 공사장에 떨어졌다. 외갓집에서 아버지 담배 심부름을 하고 대문을 들어서자 마당 한복판에서 소리가 들려 들여다봤다. 그리고는 깊게 파고들어 간 우물 속으로 떨어졌다. 깨어나 안방에 누워있는 나를 보고 놀랐다. 분명히 우물 파는 공사현장을 들여다보려 한 것 같은데 방에 누워있으니 말이다. 떨어진 거는 기억나지 않았다. 안에서 땅 파던 인부에게 떨어져 살았다고 했다. 그 인부가 더 놀라 옆방에 아직 누워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화난 외삼촌은 거의 다 파 들어간 우물을 메워버리라고 했다. 야단칠 게 뻔한 아버지를 얼른 쳐다봤으나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재를 하나 넘는 5킬로 남짓 되는 길을 걸어 돌아오는 두 시간 내내 맘을 졸였다. 언제 야단맞을지 몰라서였다. 고개를 넘어 집이 내려다보이는 데서 앉아 쉴 때 아버지가 느닷없이 “오늘 참 잘했다. 그런 호기심을 평생 잃지 마라. 궁금하면 그렇게 꼭 가서 직접 봐라”라고 했다. 태어나 처음 듣는 칭찬이기도 했지만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 있던 터여서 기억이 생생하다. 아버지는 지팡이 잡은 손을 바꿔 오른손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두어 차례 두들겨줬다. 이어서 아버지가 지팡이로 풀을 툭툭 치며 가르쳐준 고사성어가 ‘타초경사(打草驚蛇)’다. 나중에 커서야 자세히 알았지만, 그날 어둑해질 때까지 길게 말씀하신 거는 유독 기억이 새롭다. 타초경사는 풀을 두드려 뱀을 놀라게 한다는 뜻이다. 을(乙)을 징계해 갑(甲)을 깨우치는 것을 비유하거나 변죽을 울려 적의 정체를 드러나게 하거나 공연히 문

      2023-02-14 18:08
    • 바래다주려면 집 앞까지 데려다주어라

      물에 빠졌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다들 뛰어들길래 덩달아 물에 들어간 것과 가슴을 세게 압박해 깨어났던 게 전부다.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집에서 2킬로쯤 떨어진 시냇물을 시멘트 공장이 용수를 얻으려고 보로 막아 생긴 큰 물웅덩이였다. 제법 큰 아이들은 거기서 멱을 감는다고 해 따라갔다가 속절없이 물에 빠졌던 거다. 마침 외진 길을 지나던 어른이 바로 물에 두 번이나 뛰어들어 바닥에 가라앉은 나를 발로 더듬어 찾아내 살렸다. 깨어난 걸 확인한 그 어른은 자전거 뒤 짐받이에 나를 엎어 싣고 집에 왔다. 같이 간 애들은 뜀박질해 모두 뒤따랐다.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있었다. 어른이 나를 내려놓자 아버지는 큰소리로 야단치며 손으로 머리를 때렸고 나는 기절했다. 깨어났을 때 어머니는 들기름을 입에 넣어주던 숟가락을 팽개치고 나를 엎어 등을 세게 두드렸다. 기름과 물을 모래와 함께 계속 쏟아냈다. 내 기억은 단편적이지만, 모두 지켜본 애들 입을 통해 재구성하기는 어렵지 않아 지금도 생생하다. 그날 밤 잠들었을 때 누군가 머리를 만지는 거 같았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역한 담배 냄새가 났던 기억은 지금도 새롭다. 며칠 지나 물에 빠진 나를 구해준 그 어른이 집에 찾아왔다. 괜찮냐고 내게 두 번이나 물어보셨다. 부모님은 생명의 은인이라며 가겠다는 그 어른을 붙잡아 극진하게 대접했다. 그날 밤에 아버지가 말씀 중에 예외 없이 인용한 고사성어가 ‘송인송도저(送人送到邸)’다. 아버지는 “‘남을 바래다주려면 집 앞까지 데려다줘라’라는 말이다. 너를 구해주고 그 후 괜찮은지 일부러 들러 찾아준 아저씨처럼 남

      2023-02-07 16:33
    • 잘못한 일은 반드시 바로잡아라

      아버지가 경영하던 회사가 부도났다. 대학에 다닐 때다. 집에 온 나를 본 어머니는 떨리는 손을 마주 잡으며 “아버지가 한양대병원에 입원하셨대. 비서가 사람을 시켜 은밀히 알려줬다. 난 발이 안 떨어져 못 가겠다”라고 했다. 영문을 모르는 어머니는 눈물만 흘렸다. 곱돌아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아들을 어머니는 오래 지켜봤다.  서둘러 병원에 도착했으나 아버지 이름으로 입원한 환자는 없었다. 다행히 회사의 낯익은 직원 눈에 띄어 건장한 청년 몇이 문을 지키는 특실에서 환자복으로 갈아입지 않은 아버지를 만났다. 멀리 한강과 관악산을 붉게 물들인 저녁노을이 지고 야경으로 바뀔 때까지 눈을 마주치지 않는 아버지는 선 채로 말씀하셨다. 때로 흥분해 소리치기도 했지만, 그날 들은 몇 가지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고 두고두고 새길 말씀을 많이 했다.  창동 공장에서 플라스틱 용기를 생산하는 을지로 본사는 귀대인사차 딱 한 번 들렀을 때 ‘아버지 회사로구나’ 하는 인상을 지울 수 없을 만큼 규율이 엄격했다. 안내받아 지나며 만난 직원들은 목인사를 했고 사무실은 멀리서 봐도 정갈했다. 창업이 누구에게나 어렵지만 유독 어렵게 일군 아버지 회사는 1차 예금 부족으로 쉽게 부도가 난 데 이어 며칠 뒤 최종부도 처리됐다. “박 전무 그 친구 내가 그렇게 잘 봐줬는데 배신했다. 친동생보다 더 믿고 모든 걸 맡겼는데”라고 말문을 연 아버지는 “회사 자금을 빼돌려 개인적으로 유용했다”라며 부도에 이른 경위를 설명했다. 아버지는 “소인이 허물을 범하면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허물을 덮으려 꾸민다. 바로 들통 날 거짓을 스스럼없이 하는 자

      2023-01-31 17:42
    • 빈틈이 없어야 이루어진다

      삼국시대 때부터 내려온 구구단의 이름은 중국 관리들이 평민들이 알지 못하게 일부러 어렵게 9단부터 거꾸로 외운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구구단(九九段·요즘 학교에서는 ‘곱셈 구구’라 한다)을 어렵게 배웠다. 초등학교 때 외우지 못해 나머지 공부를 했다. 그래도 다 외우지는 못했다. 어둑해질 때 돌아오자 아버지가 주먹구구 셈법을 가르쳐주었다. “어떤 게 안 외워지느냐?”고 해 “7x8”이라 했다. 그날 배운 주먹구구를 다시 해보자. 왼손에 7, 오른손은 8을 각각 펼치면 펴진 손가락과 구부린 손가락이 나온다. 펴진 손가락 2와 3은 10단위로 한다. 더하면 50이다. 구부린 손가락 3과 2는 서로 곱하면 6이 나온다. 그래서 7x8=56이 된다. 잘 안 외워지던 9x7도 같은 방법으로 하면 거뜬하게 답을 구할 수 있다.  애써 구구단을 외울 필요가 없겠구나 싶은 생각이 스칠 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주먹구구 셈법은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5 이하는 계산이 안 된다. 그건 암산해야 한다. 암산은 너만 알고 남은 모른다. 사람들은 모르면 믿지 않고 믿지 못하면 따르지 않는다. 구구단은 약속이다. 나도 알고 너도 아는 언어나 문법을 쓰지 않으면 남을 이끌 수 없을뿐더러 일이 안 된다.” 우리가 흔히 쓰는 주먹구구란 말은 저렇게 생겨났다. 말씀이 끝나자 아버지는 구구단을 다 외울 때까지 학교에 열 번이고 갔다 오라고 했다. 다 외웠다고 자신하면 한 번만 갔다 와도 된다고 했다. 캄캄한 길을 더듬어가며 몇 번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에게 검사받을 때는 거침없이 외웠다.  아버지는 어린 자식이라고 해서 쉬운 말로 바꿔 말하지 않았다. 그날도 어김없이 영

      2023-01-25 16:58
    •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아라

      고등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이제 고등학교에 들어갔으니 거기까지 키워준다. 고등학교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치는 전인교육(全人敎育)을 목표로 한다. 그다음부터는 네 힘으로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아라.” ‘공부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만 가볍게 해석했던 저 말을 아버지는 지켰다. 나는 졸업하고 나서야 깨닫고 따랐다. 아버지는 한 푼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내가 한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드시 지적했다.  한참 자란 뒤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서울로 올라오던 때 아버지가 처음으로 당신의 아버지를 회고했다. “네 할아버지가 내게 준 유일한 가르침이다”라면서 종오소호(從吾所好)란 고사성어를 가르쳐줬다. 종오소호는 공자가 한 말이다. 논어(論語) 술이(述而)편에 나온다. 원문은 “부유해지려 해서 부유해질 수 있다면, 비록 채찍 잡는 일일지라도 내 기꺼이 하겠다. 그러나 부유해질 수 없다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채찍 잡는 일은 천한 직업인 마부를 말한다. 아버지는 “사람은 모두 부유하길 바란다. 공자 또한 그랬다. 부유해지는 일이 어디 마음대로 되느냐? 더욱이 떳떳하게 부유해지는 일이란 어렵다. 공자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라고 했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를 ‘간서치(看書癡)’로 평가했다. 낯선 단어였다. 뒤에 찾아보니 간서치는 책만 읽어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마흔둘에 자식을 얻은 내 증조부를 제치고 82세에 손자를 본 고조부가

      2023-01-17 17:01
    • 준비가 덜 됐으면 섣불리 나서지 마라

      휴일 새벽 전화벨이 모두를 깨웠다. 은행 다닐 때다. 다급한 전화 목소리는 다짜고짜 부장이 찾는다며 바로 출근하라며 대답을 듣지도 않고 끊어졌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옷을 챙겨입고 나설 때 이미 거실에 나와 앉은 아버지가 “뭔 일이냐?”며 물었다. “짚이는 일이 있을 거 아니냐?”며 말문을 연 아버지의 질문은 집요해 나가려던 나를 눌러 앉혔다. 네 가지 업무 때문인 거 같다고 하자 이내 단답식으로 캐물었다. “상대편이 그렇게 주장하는 진의는 뭐냐? 이편의 입장은 최종 결정인 거냐?”로 시작한 질문은 이제껏 내가 검토했던 대안 이상이었다. 한 시간은 훨씬 지나서야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새벽 시간인데도 상사 세 분은 내가 올린 보고서를 놓고 늦게 온 나를 세워둔 채 물었다. 바로 좀 전 아버지가 캐물었던 질문 그대로였다. 서슴지 않고 모두 답하고 의견을 제시했다. 부장은 바로 결론 내고 무겁던 긴급회의는 싱겁게 끝났다. 부장이 내 어깨를 두들기고 나간 뒤 아버지가 퍼뜩 떠올랐다. 낱말조차 생소했을 아버지는 마치 그 업무에 정통한 사람처럼 점치듯 다 알고 질문한 게 신기해서다.  퇴근해 아버지가 물어본 것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했다. 그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나는 그 업무를 모른다. 네가 얘기해 알았다. 답은 네가 가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상식적으로 궁금한 걸 물었을 뿐이다. 다만 들떠 있길래 그걸 가라앉혀 주고 싶어서였다”면서 “차분함을 잊으면 논리도 함께 잃는다. 준비가 덜 됐으면 섣불리 나서지 않아야 한다”라고 했다. 그날 길게 인용한 고사성어가 삼고초려(三顧草廬)다. 삼국지에서 가장 좋

      2023-01-10 17:53
    •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버릇은 병이다

      패싸움에 연루돼 입학한 지 한 달 만에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재수에 들어간 나는 서대문 교도소 뒷산 꼭대기에 방을 얻어 자취했다. 고입 재수학원에 다니는 서울 생활은 온통 신기하기만 했다. 지난해 배운 것인데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낯선 거리 풍경은 볼수록 흥미로웠고 혼자 밥 지어 먹는 재미도 있었다. 그러나 재미난 서울 유학 생활은 딱 거기까지였다. 한 달쯤 지나 생활비를 보내달라고 시골집에 보낸 편지가 돌아왔을 때는 아득하기만 했다. 아버지는 내가 보낸 편지 앞뒤를 온통 붉은 글씨로 지적해 돌려보냈다. 길게 쓰지도 않은 편지에는 고치지 않은 글자가 없었다. 맨 위에 좀 큰 글씨로 ‘고쳐서 다시 보낼 것’이라고 검은색으로 쓰인 글만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 돌아온 편지를 벽에 부적처럼 붙여놓았다. 다시 써서 보낸 편지는 정확히 2주 만에 또 되돌아왔다. 저번보다는 덜 고쳤지만, 여전히 붉은색 투성이었다.  며칠을 고심한 끝에 완성한 편지를 또 며칠을 고심하다 학원의 국어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이튿날 돌려받은 내 편지는 파란색으로 고쳐있었다. 고쳐준 대로 ‘氣體候一向萬康(기력과 체력은 그동안 만강)하십니까’로 시작하는 편지를 다시 썼다. 다섯 장이나 돼 두툼한 편지는 통과돼 돈이 같이 왔다. 그러나 아직도 군데군데 붉은 글씨로 지적한 내 편지도 함께 돌아왔다. 돈은 아껴 써도 한 달 살기엔 어려운 절반만 왔다. 생활비가 떨어진 서울 생활은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혹독했다. 매달 내는 학원비는 국어 선생님께 사정을 설명해 도움을 받았다. 종로에 있는 학원까지는 독립문에서 걸어 다녔다. 먹는 게 큰 문제였다. 물만 먹고 이틀을 버

      2023-01-03 15:01
    • 남을 가르쳐 너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려 하지 마라

      고등학교 1학년 때 성균관대학이 주최한 전국남녀고교생 문예 백일장에서 산문 부문 장원(壯元)을 했다. 시제(試題)는 ‘고양이’였다. 처음 참가하는 백일장이기도 해 떨기만 했던 기억만 난다. 뭘 썼는지 기억은 희미하다. 더듬어 기억을 되살려보니 ‘길 잃은 고양이가 혼자 사는 내 집에 들어와 적적하던 심사를 달래줬다’라는 글이었던 거 같다. 아버지에게 당시 문교부 장관 상장과 트로피를 보여 드렸을 때 크게 기뻐하셨다. 며칠 뒤 대학 신문에 실린 수상작을 읽으시고는 ‘잘 쓴 글’이라며 더 크게 기뻐하셨다. 좀체 하지 않는 칭찬도 하신 기억은 생생하다. 이듬해인 고등학교 2학년 때도 같은 백일장에 참가했다. 그날 백일장이 열린 성균관 명륜당(明倫堂) 앞에 걸린 시제는 ‘비’였다. 마찬가지로 뭘 썼는지는 기억이 흐릿하지만, 그날도 내 글이 장원에 뽑혔다. 상장과 부상을 보여 드렸을 때 아버지는 지난해보다 더 크게 기뻐하셨다. 며칠 지나 ‘비는 인생이다’로 시작하는 내 수상작이 실린 신문을 읽은 아버지는 바로 크게 나무랐다. 그때 하신 말씀이다. “너는 아직 떡잎일 뿐이다. 떡잎이 드리운 그늘이 크면 얼마나 크겠느냐. 인생을 얘기할 나이가 아니다. 네가 쓸 일은 아니다. 억지로 쓴 글은 글이 아니다. 더욱이 그 글로 상을 받고 남들에게 읽게 했다면 패악(悖惡)이다. 이런 글을 쓰지 않을 용기도 있어야 한다.” 이어 아버지는 “세상에 너는 한 사람이면 된다. 너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려고 남을 가르치지 마라. 그에게는 그의 인생이 있다”고 하셨다. 그날 아버지가 말씀 중에 인용한 고사성어가 ‘호위인사(好爲人師)’

      2022-12-27 17:09
    • 살아있다면 숨 쉬듯 공부해라

      들를 데가 많아 첫 휴가를 나와 집에 도착했을 때는 통금이 임박해서였다. 어머니는 맨발로 뛰쳐나와 반겼다. 부모님께 큰절하고 난 뒤 할 말이 많아 말이 엉겼다. 훈련소에서 크림빵 사서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먹던 얘기를 하다 느닷없이 GOP를 아세요? 하며 질문도 했다. 군 생활하며 처음 보고 느낀 놀란 일부터 말했다. 군대 얘기는 부풀려도 먹힌다. 두 분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해 들으셨다. “모택동이 죽어서 군이 비상 중이라 간신히 특별휴가 받아 나왔다”라며 생활에 잘 적응한다고 말씀드렸다. 신나게 말하는 중에 걱정하실 것 같아 “군대 있을 때는 대충하고 제대하면 정말 잘할게요”라는 말을 했다. 아버지는 듣다 말고 재떨이를 내게 던졌다. 너무 갑작스러워 머리를 맞긴 했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뭐? 대충해? 군 생활은 네 인생이 아니고 남의 인생이냐?”라고 역정을 냈다. 아버지는 “세상에 태어나고부터 위기다. 삶이란 위기의 연속이다”라고 전제한 후 “군대 생활이 네 인생에 손해고 위기란 발상이 대체 어떻게 나온 거냐”라고 따져 물었다. “군대가 생긴 이후 수백만 선배들은 모두 잘못 산 삶이냐? 너처럼 군대서 대충 살던 놈은 사회에 나와서도 똑같이 대충 산다”라고 했다. 화가 잔뜩 난 아버지는 내가 꺼낸 모택동(毛澤東) 중국 공산당 주석을 예로 들어 길게 설명했다. 그날 들은 고사성어가 ‘삼복사온(三復四溫)’이다. ‘세 번 반복해 읽고 네 번 익히라’라는 뜻이다. 모택동 자신이 만든 독서법이다. ‘붓을 움직이지 않는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라는 원칙을 그는 굳게 지켰다.

      2022-12-20 17:52
    •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아버지가 나를 불러 들려준 옛이야기다. 남편감을 인사시키면 아버지가 반대해 혼기를 놓친 딸이 “집에만 계시니 갑갑하시죠. 바깥바람 좀 쐬고 오세요. 이 도시락을 꼭 산 좋고 물 좋은 데 있는 정자를 찾아서 드시고 오세요”라고 했다. 딸이 싸준 도시락을 들고 산 좋고 물 좋은 데 있는 정자를 종일토록 찾아 헤맸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딸에게 도시락을 도로 건네주며 “산 좋고 물이 좋은데는 정자가 없고, 정자도 있고 물이 있는 데는 산이 없고, 산 좋고 정자도 있는 데 물이 없더라. 네가 말한 세 가지를 모두 갖춘 데는 찾지 못했다”라고 했다. 딸은 “그런 많지도 않은 세 가지 조건을 맞춘 경승지는 흔치 않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사람도 찾기 힘듭니다”라고 얘기했단다.  남동생과 여동생 둘을 먼저 혼인시킨 내 아버지는 장남인 나를 불러 역정을 냈다. “내가 그토록 싫어한 게 역혼(逆婚)이다. 그게 불효다. 네가 뭐가 못 나 혼인할 사람을 데려오지 못하느냐? 네가 여러 조건을 따지기 때문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날도 아버지가 어김없이 인용한 고사성어가 ‘완벽(完璧)이다. ‘벽(璧)’은 동그랗게 갈고 닦은 옥(玉)이다. 이 말은 춘추전국시대에 초(楚)나라 변화(卞和)가 발견해 초문왕(楚文王)에게 바쳤다는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운 보옥(寶玉)인 ‘화씨의 벽(和氏之璧)’ 때문에 생겼다. 이 ‘화벽(和璧)’이 조(趙)나라에 흘러 들어갔다. 이를 탐낸 진(秦)나라 왕이 15개 성과 바꾸자고 꾀었다. 힘이 약한 조나라 왕이 대장군 인상여(藺相如)에게 묻자 그가 한 말이다. “진나

      2022-12-13 13:19
    • 손이 부끄럽지 않게 선물을 들고 가라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전근 발령을 받아 다른 학교로 가게 됐다. 학교서 작별 인사를 끝내고 오자 아버지가 초록색 보자기에 싼 물건을 내주며 선생님께 갖다 드리라 했다. 묵직했다. 몇 걸음 걷다 손을 바꿔가며 들어야 했다. 이삿짐을 다 싼 선생님은 차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자기를 웃으며 건네받은 선생님은 풀어보지는 않았다. 돌아와 잘 전했다고 말씀드리자 “뭐라 하시더냐?”고 되물었다. “아무 말씀도 없고 웃기만 했다”고 하자 아버지는 “내 기분이 이렇게 좋은데 선생님도 틀림없이 좋으실 거다. 선물이란 게 그런 거다. 받는 사람도 즐겁고 준 사람도 기분 좋은 거다”라고 했다. 아버지는 “작별하고 나서 다시 찾아가니 쑥스러웠을 텐데 이럴 땐 작은 선물이라도 들고 가면 훨씬 마음이 편하다. 손이 부끄럽지 않게 작은 선물을 들고 가라. 공자(孔子)가 이미 한 말이다”라고 하셨다. 훗날 나이 들어 찾아본 고사성어가 속수지례(束脩之禮)다. ‘묶은 육포의 예절’이라는 말이다. 스승을 처음 만나 가르침을 청할 때 선물함으로써 예의를 차린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술이(述而)편에 나온다. 공자가 한 말에서 유래했다. “속수 이상의 예를 행한 자에게 내 일찍이 가르쳐주지 않은 바가 없었다[自行束脩之以上 吾未嘗無誨焉].” ‘속수’는 열 조각의 말린 고기다. 육포를 말한다. 예물 가운데 가장 약소한 것이다. 공자는 모든 가르침은 예(禮)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가장 작은 선물인 속수로 예물을 가지고 오게 해 제자의 예를 지키도록 했다.  아버지는 논어의 이 구절을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 몇 번이

      2022-12-07 10:13
    • 네가 힘들면 상대도 힘들다

      뭘 잘 못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벌 받은 기억은 생생해도 잘못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방 문을 박차고 달려나가 맨발로 도망쳤다. 아버지의 화난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까지 골목길을 뛰었다. 이젠 됐다 싶어 숨을 고르며 뒤돌아보니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뒤쫓아왔다. 골목을 빠져나와 밭길로, 논길로 내달렸다. 아버지가 따라오며 뭐라고 하셨지만, 똑똑히 듣질 못했다. 큰길로 들어섰을 때는 거의 잡힐뻔했다. 산 쪽으로 난 언덕을 숨차게 뛰어오를 때다. 뒤에서 쿵 하며 비명이 들려 돌아보니 아버지가 자전거와 함께 나뒹굴었다. 잘못됐을까 봐 어린 마음에 겁이 덜컥 나 달려가 일으켜 세웠다. 머리를 한 대 쥐어박은 아버지는 내 손을 이끌어 앉혔다. 둘은 서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을을 내려다보고 나란히 앉았다. 그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남과 경쟁할 때 절대 먼저 포기하지 마라. 네가 지치면 마찬가지로 상대도 당연히 지친다. 먼저 포기한 쪽이 지는 거다.”  그때 말씀하신 것 중에 ‘화살도 힘 떨어진다’라고 하신 게 생각나 찾아봤다. 강노지말(强弩之末)이란 고사성어다. 힘센 쇠뇌에서 튕겨 나간 화살도 마지막에는 얇은 천조차도 뚫지 못한다는 말이다. 강한 군대도 원정(遠征)을 가면 지쳐서 군력(軍力)이 약화한다는 뜻이다. 한서(漢書) 한안국전(韓安國傳)에 나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한(漢)나라를 세운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한나라보다 몇 배의 군사력을 지닌 초(楚)나라 항우(項羽)를 패배시킨 후, 흉노(匈奴) 정벌을 위해 출전했다가 포위되고 말았다. 이때 진평(陳平)의 묘책으로 포위망을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한 고조는 흉노와

      2022-11-29 15:34
    •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설날 아침 큰댁에 차례를 지내러 갔다. 초등학교 4학년 때다.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 걸음으로 30분 걸리는 새벽길을 걸었다.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를 지날 때다. 멈춰 선 아버지가 지팡이로 가리키며 “숨구멍이 저기 있었구나”라고 했다. 저수지 산 쪽 끝에 얼지 않은 물 위에 오리들이 떠 있는 게 보였다. “저기만 왜 안 얼었는지 아느냐?”고 질문한 아버지는 내가 미처 답하기 전에 이유를 설명해 버렸다. “물이 들어오는 데는 살얼음만 낀다. 영리한 오리들이 저수지가 다 얼어버리지 않게 밤새 순번 정해 빙빙 원을 그리며 헤엄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도 설날에 저수지 둑길을 걸었다. 어릴 적에 들었던 ‘저수지 숨구멍’이 기억나 여쭸다. 그날 아버지의 긴 설명을 옮기면 이렇다. 저수지도 생물이다. 강추위에 모두 얼어붙었으니 저수지가 숨은 어떻게 쉬나 궁금했다. 마침 오리들이 숨구멍을 얼지 않게 밤새 돌고 있는 게 신기했다. 미물도 저런 지혜로 저수지를 살리고 있는 걸 그때 알았다. 아버지는 “저수지는 물을 가리지 않는다. 맑은 물이나 흙탕물이라도 다 받아들인다. 깨끗하다 해서 좋아하고 더럽다고 차별하지 않는다. 저수지 반대편으로 빠져나가는 물은 깨끗하게 정화돼 흘러간다. 사람은 사람 속에서 살아야 사람이다. 인간(人間)이라는 한자가 잘 표현하고 있다. 나 홀로 저수지를 만들 수 없듯이 모든 일은 혼자 다 해 이루는 것이 아니다. 저 오리들처럼 말하지 않아도 도와주는 이가 있어서 일이 이루어진다”라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운 아버지는 고사성어와 인물 그리고 전적(典籍)을 말씀하실 적마다 자식이 알아들었는

      2022-11-22 10:39
    • 신뢰는 한결같음에서 싹튼다

      “구두 닦아 신고 다녀라.” 은행에 입행해 첫 출근 인사드릴 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딱 그 한마디만 하셨다. 모든 게 서툴러 정신없이 지내느라 잊고 있다 며칠 지나 지점 앞 구두 수선집에 구두를 닦아달라 했다. 구두를 이리저리 들춰본 주인이 몇 군데 손봐야 한다고 해 그러라고 했다. 얼굴이 비칠 만큼 반짝이는 구두를 건네받아 신고 몇 걸음 걸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내 구두만 쳐다보는 거 같아 발가락이 옴츠려 들었으나 발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자세가 바로잡아지니 걸음걸이가 달라졌다. 동료들의 광택 나는 구두도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퇴근 무렵에는 구두를 빼고 동료들은 모든 게 나와 다른 모습인 걸 알아챘다. 좋아하던 흰색을 버리고 검은색 양말로 바꿔 신으며 거기에 맞춰 양복이며 심지어 말투까지 모두 동료들과 어울리게 바꿨다. 며칠 뒤 출근 인사드릴 때 나를 둘러보던 아버지가 차고 있던 커프스 버튼을 풀어 줬다. 양복 주머니에 꽂은 작은 머리빗도 꺼내주며 하신 말씀이다. “마름(지주로부터 소작지의 관리를 위임받은 관리인) 일을 해 우리 집을 일으킨 네 고조부가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러지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며 네 할아버지가 나를 똑같이 가르쳤다.” 그렇게 시작한 말씀이 그날은 길어 결국 출근이 늦었다. 96세로 장수한 고조부는 82세에 첫 손자를 얻었다. 고조부는 42세에 첫 아이를 얻은 증조부를 제치고 손자인 내 할아버지를 직접 혹독하게 가르쳤다. 남긴 말씀이 ‘용모단정(容貌端正)과 의관정제(衣冠整齊)’다. 그게 상대를 존경하고 상대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는 신호라고 고조부는 손자에

      2022-11-15 16:01
    • 베풀 수 있어야 강자다

      제천역에 기차를 내리자마자 동생과 함께 서둘러 시발택시를 탔다. 시발(始發)택시는 당시 유행하던 지프를 개조한 우리나라 최초의 택시다. 동생이 초등학교 1학년, 내가 4학년 때다. 탄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택시를 내렸다. 둘이 뛰어서 중국집에 들어갔다. 자장면을 처음 먹어보는 동생은 면을 입에 가득 물고 연신 맛있다며 좋아했다. 내가 더 좋았다. 며칠 뒤 저녁 먹을 때 어머니가 얘기를 꺼냈다. “얘들이 제천에 기차 타고 가서 택시를 탔답디다. 장에 가던 동네 사람들이 봤다면서 ‘애가 되바라지다’고 수군댄다고 얘기를 전해주더라구요”라고 했다. 아버지는 왜 택시를 탔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내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동생에게 자장면을 사주기 위해 빨리 가려고 탔다고 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들고 있던 숟가락으로 밥상을 세게 내리치며 “참 잘했다. 잘했어. 앞으로도 꼭 그렇게 해라”라고 했다. 그리고는 더 말씀이 없었다. 몇 년 뒤 중학교 다닐 때 아버지와 그 중국집에 갔다. 식사를 마칠 즈음 그날을 떠올리며 아버지가 처음 칭찬해줬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칭찬받을 일을 했다. ‘동기간에 우애가 있어야 한다’고 명령한다고 따르지 않는다. 가르치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스스로 깨우쳤으니 마땅히 칭찬받을 일이다”라고 했다. 아버지가 이어 가르쳐준 고사성어가 ‘녹명(鹿鳴)’이다. 녹명은 먹이를 발견한 사슴이 다른 사슴을 찾아 부르는 울음소리다. 중국 시가집 시경(詩經) 소아(小雅) 편에 나오는 말이다. 원문은 ‘유유녹명 식야지평[呦鹿鳴 食野之苹]’. 사슴이 기쁜 울음소리를 내 먹이 있는 곳을

      2022-11-08 17:23
    • 똑바로 보아라

      난생처음 서울 남산에 올랐다. 올랐다기보다 ‘갔다’가 맞다. 부모님과 케이블카를 타고 갔으니 말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다. 같은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동생과 함께다. 까만 교복을 입은 두 아들을 쳐다보며 아버지가 좋아했다. 남산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서울은 한양 조씨 본향이다. 9대 말손(末孫) 할아버지 때 ‘벼슬길에 나서지 말라’는 선조의 유훈을 좇아 충주를 거쳐 14대 진(瑨) 할아버지 때 제천을 세거지(世居地)로 삼았다. 내가 25대니 거의 500년 유훈을 받들었으면 됐다 싶어 서울로 왔다. 이제부터 내가 ‘서울 조씨’ 시조다.” 서울로 온 지 1년 되는 날 두 아들을 데리고 남산을 찾은 아버지는 하고 싶은 말씀을 이어갔다. “내가 서울에 보따리를 풀어놨다. 너희는 서울을 시작으로 전 세계 어디든 살고 싶은데 가서 살아라.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해라. 너희 앞날을 발목 잡고 싶지 않다.” 아버지는 좌청룡 우백호(左靑龍 右白虎) 풍수를 따라 지은 경복궁을 가리켰다. 왼편의 인왕산과 오른쪽의 낙산을 가리키던 아버지는 임금이 앉은 자리에서 보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것과 좌우가 다르다고 설명했다. 아버지는 ‘나를 중심으로 보되 언제나 상대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통치자는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아 한쪽에서만 보려 한다고도 했다. 보고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고도 했다. 이편에서는 옳지만, 저편에서 보면 틀릴지도 모르니 언제나 올바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끝에 ‘~보다’가 붙은 말이 많은 건 그만큼 보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냥 보다’가 아니라 ‘똑바로 보다’가 중

      2022-11-01 11:22
    •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선행이 아니라 거래다

      아버지 애창곡은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공원’이었다. 29세에 요절한 그가 절규하듯 불렀다. 그 노래를 아버지가 부르는 걸 몇 번 들었다. 전상을 입어 다리를 절단한 아버지는 절망 속에서 오랜 병원 생활을 견뎌내는 중에 억척스레 노래 공부를 했다. 스승을 모셔 실력을 갖춘 아버지는 노래자랑 대회에서 몇 차례 수상했다. 그때 수상 곡은 백난아의 ‘찔레꽃’. 기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기도 했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장충단공원은 조선 시대 도성 남쪽 수비군이 주둔한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자리다. 명성황후 시해 때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1900년 고종황제가 ‘장충단(奬忠壇)’을 세웠다. 글씨는 순종이 썼다. 해마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 대한제국의 국립현충원이었다. 1910년 일제는 자신들의 흑역사를 담은 장충단을 폐사해 공원으로 만들었다.  아버지는 장충단공원에서 전국상이군경 임의단체를 조직하고 대표로 선출돼 ‘국가도 백성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며 연설했다. 1991년이었다. 왕조시대에도 나라가 은혜를 입으면 장충단을 세워 기렸다며 민주공화국에서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의 처우가 부당하다고 역설했다. 연설이 끝나자 감동한 청중 중 한 사람이 저 노래를 처연하게 부르자 모두 따라 불렀다고 한다. 몇 년에 걸친 법정투쟁 끝에 ‘국가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전면개정으로 아버지의 뜻은 관철돼 지금의 보상체계가 갖추어졌다.  아버지는 그날 이후 애창곡이 저 노래로 바뀌었다고 했다. “지난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라는 노랫말을 쓴

      2022-10-25 17:36
    • 물은 절대로 앞서가지 않는다

      어릴 때 싸움은 코피가 나면 끝난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다. 그날도 그랬다. 나보다 한 뼘이나 키가 더 큰 동급생에게 얼굴을 한 대 맞자마자 바로 코피가 터졌다. 집에 오자 아버지가 이유를 물었다. 나이는 한 살 위지만 한 해 꿇어 같이 다니는 동급생이 형이라고 안 한다며 때렸다고 했다. 아버지는 더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세 아들을 두신 할아버지는 돌림자를 빼고 가운데 글자를 큰아들은 ‘헤엄칠 영(泳)’을, 둘째인 내 아버지는 ‘근원 원(源)’을, 막내에겐 ‘물 솟아 흐를 규(湀)’자를 각각 넣어 이름을 지었다. 아버지는 가장 좋아하는 글자가 ‘물 수(水)’자인 할아버지가 자식의 이름에 모두 물이 들어가는 글자를 넣었다고 했다.  집 대문의 문패가 ‘원행(源行)’과 ‘중행(仲行)’ 두 개가 걸려있었으나, 중학교 입학하고 호적등본을 떼 학교에 낼 때 아버지 이름이 바뀐 걸 제대로 알았다. 1957년. 할아버지가 47세에 돌아가신 그해 분가한 아버지는 아명(兒名)인 ‘근원 원(源)’을 버리고 ‘버금 중(仲)’자로 바꿔 개명했다. 호적등본은 그날 분가와 혼인신고, 첫째인 나와 56년생인 동생의 출생신고를 한꺼번에 했다고 나온다.  내 고조와 증조부는 97세, 80세로 장수했다. 두 분은 마흔 살이 넘어 자식을 얻었다. 할아버지는 큰아들을 18살에 얻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자식 이름 작명을 이렇게 풀이했다. “아마 너희 할아버지는 많이 어려워하신 거 같다. 그래서 큰아들 이름에 ‘네 마음대로 세상을 헤엄쳐 살아라’란 뜻을 담은 거 같다. 두뇌가 비상하고 탐구심 강한 막내는 샘솟는 물처럼 지혜롭게 살라는 뜻을 이름에

      2022-10-19 1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