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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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역에 기차를 내리자마자 동생과 함께 서둘러 시발택시를 탔다. 시발(始發)택시는 당시 유행하던 지프를 개조한 우리나라 최초의 택시다. 동생이 초등학교 1학년, 내가 4학년 때다. 탄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택시를 내렸다. 둘이 뛰어서 중국집에 들어갔다. 자장면을 처음 먹어보는 동생은 면을 입에 가득 물고 연신 맛있다며 좋아했다. 내가 더 좋았다.

며칠 뒤 저녁 먹을 때 어머니가 얘기를 꺼냈다. “얘들이 제천에 기차 타고 가서 택시를 탔답디다. 장에 가던 동네 사람들이 봤다면서 애가 되바라지다고 수군댄다고 얘기를 전해주더라구요라고 했다. 아버지는 왜 택시를 탔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내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동생에게 자장면을 사주기 위해 빨리 가려고 탔다고 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들고 있던 숟가락으로 밥상을 세게 내리치며 참 잘했다. 잘했어. 앞으로도 꼭 그렇게 해라라고 했다. 그리고는 더 말씀이 없었다.

몇 년 뒤 중학교 다닐 때 아버지와 그 중국집에 갔다. 식사를 마칠 즈음 그날을 떠올리며 아버지가 처음 칭찬해줬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칭찬받을 일을 했다. ‘동기간에 우애가 있어야 한다고 명령한다고 따르지 않는다. 가르치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스스로 깨우쳤으니 마땅히 칭찬받을 일이다라고 했다. 아버지가 이어 가르쳐준 고사성어가 녹명(鹿鳴)’이다. 녹명은 먹이를 발견한 사슴이 다른 사슴을 찾아 부르는 울음소리다. 중국 시가집 시경(詩經) 소아(小雅) 편에 나오는 말이다. 원문은 유유녹명 식야지평[呦鹿鳴 食野之苹]’. 사슴이 기쁜 울음소리를 내 먹이 있는 곳을 알리면 그 소리에 다북쑥을 뜯어 먹으러 몰려든다는 뜻이다. 여느 짐승들은 먹이를 발견하면 혼자 먹고 남는 것은 숨긴다. 사슴만은 오히려 울음소리를 높여 배고픈 동료들을 불러 먹이를 나눠 먹는 습성에서 나온 말이다.

아버지는 사슴은 임금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신라 왕의 금관도 사슴뿔을 형상화한 거다. 그만큼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이다. 그래서 고귀하다. 세상은 홀로 사는 게 아니라 더불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전제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더불어 사는 이치를 아버지는 저승에는 젓가락이 너무 길다. 지옥 간 사람들은 음식을 자기 입에 넣을 수 없어 먹지 못한다. 천당 사람들은 내 입에 넣을 생각을 하지 않고 남에게 먼저 먹여주기 때문에 서로가 배부르다고 한다고 설명하며 이승에서도 마찬가지다라고 덧붙였다.

아버지의 그 날 말씀은 밥 먹는 시간보다 훨씬 더 길었다. 식탁을 치운 종업원이 새로 가져다준 엽차를 두 번이나 더 시켜먹었다. “먹이를 발견한 사슴이 강자(强者). 녹명을 듣고 달려온 사슴이 약자(弱者). 강자는 약자가 있어 강자가 된다. 강자가 베푸는 거다. 베풀 수 있어야 강자로 남는다. 강자가 앞장서기에 약자는 배우고 따라 강자가 되는 거다라고 아버지는 녹명을 풀이했다. 아버지는 내가 동생에게 자장면을 사준 일을 두고 베풀면 내 마음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마음으로 하면 안 될 일도 된다. 그런 게 쌓여 일이 성사되기 때문이다. 일은 내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베푸는 그 마음은 결국 자신을 위하는 길이다라는 결론을 끌어냈다. 까칠한 내 성정을 고치려는 아버지의 뜻이 담긴 녹명은 평생 좌우명으로 지니고 산다. 그래서 제천에 갈 때면 70년이 다 된 그 노포(老鋪)에 꼭 들른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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