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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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피스트
설날 아침 큰댁에 차례를 지내러 갔다. 초등학교 4학년 때다.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 걸음으로 30분 걸리는 새벽길을 걸었다.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를 지날 때다. 멈춰 선 아버지가 지팡이로 가리키며 “숨구멍이 저기 있었구나”라고 했다. 저수지 산 쪽 끝에 얼지 않은 물 위에 오리들이 떠 있는 게 보였다. “저기만 왜 안 얼었는지 아느냐?”고 질문한 아버지는 내가 미처 답하기 전에 이유를 설명해 버렸다. “물이 들어오는 데는 살얼음만 낀다. 영리한 오리들이 저수지가 다 얼어버리지 않게 밤새 순번 정해 빙빙 원을 그리며 헤엄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도 설날에 저수지 둑길을 걸었다. 어릴 적에 들었던 ‘저수지 숨구멍’이 기억나 여쭸다. 그날 아버지의 긴 설명을 옮기면 이렇다. 저수지도 생물이다. 강추위에 모두 얼어붙었으니 저수지가 숨은 어떻게 쉬나 궁금했다. 마침 오리들이 숨구멍을 얼지 않게 밤새 돌고 있는 게 신기했다. 미물도 저런 지혜로 저수지를 살리고 있는 걸 그때 알았다. 아버지는 “저수지는 물을 가리지 않는다. 맑은 물이나 흙탕물이라도 다 받아들인다. 깨끗하다 해서 좋아하고 더럽다고 차별하지 않는다. 저수지 반대편으로 빠져나가는 물은 깨끗하게 정화돼 흘러간다. 사람은 사람 속에서 살아야 사람이다. 인간(人間)이라는 한자가 잘 표현하고 있다. 나 홀로 저수지를 만들 수 없듯이 모든 일은 혼자 다 해 이루는 것이 아니다. 저 오리들처럼 말하지 않아도 도와주는 이가 있어서 일이 이루어진다”라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운 아버지는 고사성어와 인물 그리고 전적(典籍)을 말씀하실 적마다 자식이 알아들었는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날 가르쳐주신 고사성어가 ‘해불양수(海不讓水)’다. ‘바다는 어떠한 물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포용해야 함’을 이르는 말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살았던 관중(管仲)의 업적을 쓴 책 관자(管子)의 형세해(形勢解) 편에 나온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형과 왕위를 두고 치열하게 다툴 때 그를 암살하려고 화살을 쏜 사람이 관중이었다. 왕권을 잡은 환공은 자기를 죽이려 했던 그를 내치지 않고 오히려 재능을 높이 사 승상으로 추대했다. 관중은 환공을 도와 제나라를 강대국으로 발전시키는 초석을 놓았다. 원문은 이렇다. “바다는 크고 작은 물, 깨끗한 물, 더러운 물을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 능히 넓게 될 수 있고[海不讓水 故能成其大], 산은 크고 작은 돌이나 흙을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 능히 높게 될 수 있으며, 현명한 군주는 신하와 백성을 귀찮게 여기지 않아 능히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다.”
아버지 말씀은 집에 도착해서야 끝났다. 마지막 말씀은 “네 잣대로 사람을 가리지 마라. 쓸데없는 물 없듯이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내가 그의 재능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의 장점을 발견하려고 애써라”라는 당부였다. 말씀을 잊지 않으려고 스스로 호를 ‘유담(維潭)’으로 지어 지금까지 쓴다. 해불양수는 말하긴 쉽다. 그러나 ‘남을 너그럽게 감싸주거나 받아들이는 포용심(包容心)’을 갖추지 못하면 마냥 어려운 말이다. 뉴욕에서 초등학교 다니던 아들이 흑인 친구 목을 감싸 안으며 장난치며 노는 걸 본 아내는 질겁했다. 나는 더 놀랐다. 그렇게 포용심은 남이 틀린 게 아니라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온다.
손주들에게도 꼭 물려주고 싶은 심성이다. 며칠 전 저수지를 다시 찾았다. 저수지는 큰 길이 나는 바람에 절반 크기로 쪼그라들었다. 물이 들어오는 저수지 숨구멍은 이전만은 못해도 물을 가리지 않고 여전히 다 받아주고 있었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고등학교 때도 설날에 저수지 둑길을 걸었다. 어릴 적에 들었던 ‘저수지 숨구멍’이 기억나 여쭸다. 그날 아버지의 긴 설명을 옮기면 이렇다. 저수지도 생물이다. 강추위에 모두 얼어붙었으니 저수지가 숨은 어떻게 쉬나 궁금했다. 마침 오리들이 숨구멍을 얼지 않게 밤새 돌고 있는 게 신기했다. 미물도 저런 지혜로 저수지를 살리고 있는 걸 그때 알았다. 아버지는 “저수지는 물을 가리지 않는다. 맑은 물이나 흙탕물이라도 다 받아들인다. 깨끗하다 해서 좋아하고 더럽다고 차별하지 않는다. 저수지 반대편으로 빠져나가는 물은 깨끗하게 정화돼 흘러간다. 사람은 사람 속에서 살아야 사람이다. 인간(人間)이라는 한자가 잘 표현하고 있다. 나 홀로 저수지를 만들 수 없듯이 모든 일은 혼자 다 해 이루는 것이 아니다. 저 오리들처럼 말하지 않아도 도와주는 이가 있어서 일이 이루어진다”라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운 아버지는 고사성어와 인물 그리고 전적(典籍)을 말씀하실 적마다 자식이 알아들었는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날 가르쳐주신 고사성어가 ‘해불양수(海不讓水)’다. ‘바다는 어떠한 물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포용해야 함’을 이르는 말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살았던 관중(管仲)의 업적을 쓴 책 관자(管子)의 형세해(形勢解) 편에 나온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형과 왕위를 두고 치열하게 다툴 때 그를 암살하려고 화살을 쏜 사람이 관중이었다. 왕권을 잡은 환공은 자기를 죽이려 했던 그를 내치지 않고 오히려 재능을 높이 사 승상으로 추대했다. 관중은 환공을 도와 제나라를 강대국으로 발전시키는 초석을 놓았다. 원문은 이렇다. “바다는 크고 작은 물, 깨끗한 물, 더러운 물을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 능히 넓게 될 수 있고[海不讓水 故能成其大], 산은 크고 작은 돌이나 흙을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 능히 높게 될 수 있으며, 현명한 군주는 신하와 백성을 귀찮게 여기지 않아 능히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다.”
아버지 말씀은 집에 도착해서야 끝났다. 마지막 말씀은 “네 잣대로 사람을 가리지 마라. 쓸데없는 물 없듯이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내가 그의 재능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의 장점을 발견하려고 애써라”라는 당부였다. 말씀을 잊지 않으려고 스스로 호를 ‘유담(維潭)’으로 지어 지금까지 쓴다. 해불양수는 말하긴 쉽다. 그러나 ‘남을 너그럽게 감싸주거나 받아들이는 포용심(包容心)’을 갖추지 못하면 마냥 어려운 말이다. 뉴욕에서 초등학교 다니던 아들이 흑인 친구 목을 감싸 안으며 장난치며 노는 걸 본 아내는 질겁했다. 나는 더 놀랐다. 그렇게 포용심은 남이 틀린 게 아니라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온다.
손주들에게도 꼭 물려주고 싶은 심성이다. 며칠 전 저수지를 다시 찾았다. 저수지는 큰 길이 나는 바람에 절반 크기로 쪼그라들었다. 물이 들어오는 저수지 숨구멍은 이전만은 못해도 물을 가리지 않고 여전히 다 받아주고 있었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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