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에서 형님을 생각하며(燕巖憶先兄)

                                          박지원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던가.

아버지 생각날 때마다 형님을 쳐다봤지.

이제 형님 그리운데 어디에서 볼까

의관 갖춰 입고 냇물에 비춰봐야겠네.

我兄顔髮曾誰似 每憶先君看我兄

今日思兄何處見 自將巾袂映溪行.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51세 때인 1787년에 형을 추모하며 쓴 시다. 그보다 일곱 살 위인 형 박희원(朴喜源)은 그해 7월 세상을 떠났다. 1월에 동갑내기 부인을 떠나보낸 데 이어 맏며느리까지 잃고 난 뒤여서 그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연암은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나 형을 무척 따랐다. 서른한 살 때인 1767년에 아버지 박사유(朴師愈)가 64세로 돌아가셨는데, 아버지는 백면서생으로 소일하다 늦게야 음서로 출사해 정5품 통덕랑에 머물렀다. 연암은 유산을 가난한 형에게 몰아주고 서대문 밖으로 집을 옮겼다.

떨어져 사는 동안에도 연암의 형제애는 각별했다. 형님에게 자식이 없자 둘째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첫 아들을 양자로 보냈다. 정조 즉위 직후 세도를 부리던 홍국영의 표적이 돼 황해도 금천의 연암골로 피신했을 때도 형님 식구들을 설득해 함께 갔다. 그의 호 연암은 이 골짜기 이름을 딴 것이다.

형님보다 9년 먼저 세상을 떠난 형수에게는 절절한 묘지명을 지어 바쳤다. 연암골 집 뒤에 마련한 형수의 묘에 형님을 합장하고 애틋한 추모시까지 바쳤으니, 연암의 속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추모시 치고는 뭔가 좀 이상하다. 무겁고 슬픈 게 아니라 동심 같은 순수와 해학이 곁들여져 빙그레 웃음까지 짓게 만든다. 닮은꼴 ‘붕어빵’ 가족의 아릿한 유머라고나 할까. 형님 얼굴과 수염이 아버지를 닮았고 자신은 그런 형님을 빼닮았다는데…

실제로 연암의 외모는 어땠을까. 아들 박종채가 《과정록(過庭錄)》에 묘사한 것을 보면 큰 키에 살이 쪄서 몸집이 매우 컸다. 얼굴은 긴 편인데 안색이 붉고 광대뼈가 불거져 나온 데다 눈에는 쌍꺼풀이 있었다. 목소리는 매우 커서 그냥 말을 해도 담장 밖 한참 떨어진 곳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의 제자 이덕무(1741~1793)는 추모시 ‘연암에서 형님을 생각하며(燕巖憶先兄)’를 읽고 “정이 지극하여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게 하니 정말 진실하고 절절하다. 내가 선생의 시를 읽고 눈물 흘린 것이 두 번이었다”고 했다.

이덕무가 말한 또 하나의 눈물겨운 시는 큰누나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연암이 묘지명에 쓴 시 ‘누님을 보내며’다. ‘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 화장하던 것이 어제 일만 같구나./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네’로 시작하는데, 시집가는 누나가 미워 화장품에 먹물을 섞어놨던 일화까지 언급하며 아련한 ‘눈물 웃음’의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시다.

어디 연암만 그랬을까. 2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무심코 거울을 보다 깜짝 놀라는 중년 남자들이 많다. 벗겨진 이마와 늘어나는 주름, 여기저기 새치가 희끗거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아버지여서 그렇다. 연암의 ‘냇물에 비친 자화상’도 그랬을 것이다. 굳이 거울 대신 냇가에 나가 자신을 비춰보는 마음이 실로 선하게 다가온다.

연암의 또 다른 시 한 편.

마상구호(馬上口號)

푸른 깃에 은정자(銀頂子) 모자 무부(武夫) 같은 모습으로

요양(遼陽) 천 리 길 사신 수레 뒤따랐네.

중국에 한번 들어온 뒤 호칭 세 번 바뀌었으니

좀스런 선비들은 예로부터 물고기 벌레 따위나 배우는 법.

翠翎銀頂武夫如 千里遼陽逐使車

一入中州三變號 鯫生從古學蟲魚

이 시는 47세에 중국을 처음으로 가는 말 위에서 즉흥적으로 노래한 것. 자신의 행색과 심정을 해학적으로 읊었다. 『열하일기(熱河日記)』 「피서록(避暑錄)」에 이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사신을 따라서 중국에 들어가는 이는 반드시 칭호 하나씩을 가지는 법이다. 그리하여 역관을 종사(從事)라 하고, 군관을 비장(裨將)이라 하며, 놀 양으로 가는 나와 같은 이는 반당(伴當)이라 부른다. 우리나라 말에 소어(蘇魚)를 반당(盤當, 밴댕이)이라 하니, 반(盤)과 반(伴)의 음이 같은 까닭이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면 아까 이른바 반당은 은빛 모자와 정수리에 푸른 깃을 꽂고 짧은 소매에 가뿐한 행장을 차리게 된다. 이를 본 길가의 구경꾼들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새우라고 부른다. 어째서 새우라 하는지는 모르나, 대체로 무부(武夫)의 별호인 듯싶다. 또 지나는 곳마다 어린이들이 떼를 지어 몰렸다가 일제히 ‘가오리가 온다. 가오리가 오네.’ 하고, 또는 말 꼬리에 따라오면서 다투어 가며 지껄인다.

가오리가 온다는 것은 고려(高麗)가 온다는 말이다. 나는 일행더러, ‘이제 세 가지 물고기로 변하는구먼.’ 하고는 웃었다. 모든 사람들은, ‘어째서 세 가지 물고기라 하는가?’ 한다. 나는, ‘길을 떠날 때에는 반당이라 하였으니 이는 소어요, 압록강을 건넌 뒤로는 새우라고 하니 새우도 역시 고기의 한 족속이요, 되놈 애들은 모두 가오리 하고 부르니 이는 홍어(洪魚)다.’ 하니, 곧 사람들은 모두 깔깔 웃었다. 나는 이내 말 위에서 시 한 절을 불렀다.

그게 곧 이 시다. (다른 설명에 따르면 ‘가오리가 온다’는 말은 ‘까올리(高麗)가 온다’는 말이다. 아직도 중국인들은 한국인을 욕할 때 ‘가오리빵즈(高麗棒子·고구려놈)’라고 한다. 직역하면 ‘고구려 몽둥이(棒子, 은유적으로 상상하길)’인 이 말이 문어체로 바뀌면 중국 사서에 자주 나오는 ‘고려미물(高麗微物)’이라고 한다.)

내친김에 ‘산행(山行)’이라는 시도 함께 보자. 끝 구절이 절창이다.

산행(山行)

소 모는 소리 구름 가에서 들리고,

높은 산봉우리들은 푸르게 겹치며 하늘을 찌르네.

견우직녀는 어찌하여 오작교로만 건너려 하는고,

은하 서쪽에 달이 배가 되어 떠 있는데.

叱牛聲出白雲邊 危嶂鱗塍翠揷天 牛女何須烏鵲渡 銀河西畔月如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