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유의 아버지'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 별세
‘두유의 아버지’로 불리는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이 9일 별세했다. 향년 100세.

의사 출신인 정 명예회장은 1917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 최초의 두유 베지밀을 개발한 두유산업의 선구자다. 정 명예회장은 두 살 때 부친을 여의고 목욕탕 청소부 등으로 일하며 홀어머니와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다. 15세에 평양 기성의학강습소에서 교재를 복사하는 일을 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19세 나이에 최연소로 의사 검정고시에 합격해 1937년 서울 명동성모병원 소아과에서 의사 생활을 시작했다.

정 명예회장은 “인류 건강문화를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며 평생 두유를 연구했다. 소아과 의사 시절 모유나 우유를 소화하지 못해 영양실조로 아기들이 숨지는 것을 본 게 계기가 됐다. 그는 영아 사망의 해법을 찾기 위해 44세에 늦깎이 유학을 떠났다. 영국 런던대학원과 미국 샌프란시스코 UC메디컬센터 등에서 5년을 보냈다.

정 명예회장은 1966년 유당이 없고 영양소가 풍부한 콩을 이용해 선천성 유당불내증(우유 등 유당을 소화하지 못하는 증상) 아기를 위한 치료식 두유를 개발했다. 콩에 영양분이 풍부하다는 점에 착안해 집에서 아내와 함께 콩으로 음료를 만든 것이 시작이었다. 이를 ‘식물성 우유’라는 뜻의 베지밀로 이름 지었다.

베지밀을 내놓자 전국의 유당불내증 환자가 몰려들었다. 1973년 정식품을 창업하고 대량 생산을 시작했다. 1984년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두유 생산시설을 갖춘 청주공장을 준공했고, 이듬해 중앙연구소를 세워 제품 개발과 품질 개선에 힘썼다. 베지밀은 아시아, 유럽, 서아프리카, 중동 등 15개국에 수출되고 있다. 호주와 미국 등에서는 두유 발명 특허를 받기도 했다.

정 명예회장은 “두유를 만드는 데 인생을 걸었다”며 기업의 이윤 추구나 외형 확대보다는 안전한 제품 개발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정식품은 시장 1위 브랜드로는 이례적으로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전문기업인 ‘자연과 사람들’을 설립해 경쟁 기업에 원료를 제공했다. 정 명예회장은 평소 “정식품이 두유에 관한 발명특허를 많이 받았는데 다른 업체도 두유를 생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몸에 좋은 두유를 더 많은 사람이 마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하곤 했다. 그 결과 두유회사는 10군데가 넘고 제품도 다양해졌다.

정 명예회장은 “누구든 공부에 가슴앓이를 하지 않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1984년 ‘혜춘장학회’를 설립했다. 장학회는 33년간 약 2350명에게 21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그는 최근까지도 공부를 손에 놓지 않고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유지해왔다. 매일 오전 영어방송을 듣고 콩의 효능에 대한 연구 논문을 끊임없이 읽은 뒤 정식품 중앙연구소 연구원들과 토론도 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정성수 정식품 회장과 딸 정조숙·명숙·인숙·민숙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이며 발인은 12일 오전 8시, 장지는 용인천주교묘지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