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렁쇠 소년' 윤태웅씨 "영화배우로 '감동' 재현할 터"
"굴렁쇠는 희망과 용기의 원천이 됐어요. 연극 이어 영화배우로 '감동' 재현할 터"

서울올림픽 20주년 행사 통해 그날 회고

참 많이 컸다.세월의 힘인가 싶다. '굴렁쇠 소년' 윤태웅 씨.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가장 인상적인 기억을 남긴 인물이다.

텅 빈 잠실주경기장의 잔디밭. 수만 관중이 숨을 죽이고 있는 사이에 앳된 소년 하나가 굴렁쇠를 굴리며 운동장에 나타났다.

예상 밖의 파격이었다. 하얀 모자에 반바지 차림을 한 이 소년은 한참 동안 굴렁쇠를 굴리더니 가운데쯤에 멈춰선 채 관중들에게 오른손을 번쩍 들어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관중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떤 대규모 퍼레이드도 이런 색깔의 감동을 뭉클하게 자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여덟 살 소년은 지금 스물여덟 살 어른으로 성장해 있다. 20년이라는 세월이 사람과 세상을 이렇게 바꿔놓은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굴렁쇠 소년'으로 불리는 윤씨. 한국스포츠사는 물론 그 자신에게도 그날은 특별한 순간이었다.

베이징올림픽이 다가와서인지 감회가 더욱 새롭다.

"너무 어려서일가요, 아니면 너무 긴장해서일까요? 개막식 때 굴렁쇠를 굴렸던 기억은 막상 거의 남아 있지 않아요. 굴리기 전에 탈춤과 태권도 시범이 있었고, 굴리고 난 뒤에 아이들 퍼포먼스가 있었다는 사실만 기억나요." 철없던 때여서 그런 것 같다.

윤씨는 굴렁쇠 굴리기가 이후의 삶과 별로 관계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저 한때의 추억 정도랄까?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날의 감흥이 알게 모르게 삶의 깊숙한 곳에서 희망과 용기의 원천이 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감동이란 게 이토록 큰 힘을 가졌구나 하고 깨닫기도 한다.

윤씨는 2006년 6월에 연극배우가 됐다. '19 그리고 80'이란 작품에서였다.

작품은 19살짜리 소년과 80세 노파의 이야기. 이 신인배우는 원로배우 박정자 씨와 함께 무대에 서는 영광을 누리며 데뷔했다.

그를 무대에 올려놓은 것 역시 '감동'이었다.

"굴렁쇠 소년과 연극 배우의 공통분모는 '감동'이었습니다. 감동을 주는 게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를 세월 속에서 실감한 거지요. 굴렁쇠 굴리는 장면에 감동받았다는 분들이 많았아요.그 감동을 성인이 돼 무대 연기자로서 안겨드리고 싶었어요."

그가 굴렁쇠 소년이 된 건 아주 우연이었다.

부모님이 올림픽 개막식에 나갈 굴렁쇠 소년을 선발한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신청서를 내본 것이다.

당시에 윤군은 굴렁쇠를 굴릴 줄 몰랐다.

신청 대상자는 1981년 9월 30일생이어야 했다.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된 날이 바로 그날이었기 때문이다. 윤군은 수백 명이 몰려든 신청자 중에서 유일한 행운아가 됐다.

올림픽을 두어 달 앞둔 어느날이었다.

윤군은 이날부터 아버지랑 효창운동장, 잠실주경기장 등을 돌어다니며 굴렁쇠를 부지런히 익혔다. 난생 처음이었지만 하루하루가 신났다.

참고로, 아버지 윤명열 씨는 평생을 축구로 살고 있는 체육인이다. 경희중고교와 대학에서 선수로 뛰었고, 졸업 후에는 조흥은행실업팀에서 활약했다. 지금은 K리그 경기감독관으로 일한다.

"운동과는 원래 인연이 깊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축구인이어서 그 피를 이어받았다고 할까요? 어려서부터 태권도를 했고, 축구 선수의 꿈도 가져봤어요. 전공은 경기대에서 체육학으로 했구요. 지금 와서 보니 굴렁쇠 소년도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그의 태권도 실력은 빵빵하다. 공인 4단 실력이니 말이다.

윤씨가 해병대를 자원해 연평도에서 복무했던 것도 태권도와 관련이 있다. 해병대 출신인 태권도 사범의 영향을 받아서다.

해안중대 소속으로 복무하던 2002년엔 서해교전이 터져 긴급상황에서 한동안 고생하기도 했다.

"'굴렁쇠 소년'은 제 인생에 알게 모르게 큰 원동력이 되고 있어요. 체격이 커지고 얼굴이 달라져 쉽게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지만 행실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도 늘 합니다. 국민들의 기억 속에 감동으로 남아 있는 '굴렁쇠 소년'으로서, 그리고 '88호돌이'로서 누를 끼쳐선 안되기 때문이죠."

윤씨는 특히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을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게 된 걸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굴렁쇠 소년 아이디어를 맨처음 냈던 사람이 바로 이 전 장관이다.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자주 찾아뵙는다는 것이다.

그를 만날 때마다 이 전 장관도 무한한 감회에 젖는다고. 자신을 '할아버지'라며 따랐던 꼬마가 어느새 '선생님'이라고 부를 만큼 컸으니 말이다.

"선생님은 저의 정신적 사표세요. 힘든 일이 있으면 위안과 힘을 주시고, 직접 만나거나 이메일을 통해 조언도 많이 해주십니다. 고민거리가 생겼을 땐 찾아뵙고 길을 여쭙기도 하구요. 세상에서 가장 저를 아껴주시는 분이세요.물론 부모님과도 종종 만나시구요."

윤씨가 배우의 길을 걷겠다고 하자 부모는 한동안 반대했다.

그때 부모를 설득하고 그의 등을 떠밀어 지원해준 사람이 바로 이 전 장관이었다.

이 전 장관은 "굴렁쇠를 굴렸을 때의 감동을 무대에서 선사해보라"며 용기를 줬다.

'베스트(bestㆍ최고)'가 되기보다 '우운리(onlyㆍ단 하나)'가 되라는 말도 덧붙이곤 한다.

그의 '감동 여행'은 계속된다. 연극에 이어 스크린에도 데뷔해 꿈을 활짝 펼칠 계획이다.

영화 섭외는 두어 작품에서 들어오고 있는데, 태권도 시범단 영화가 먼저일 것 같다고. 윤씨는 영화 이름을 아직 공개할 때가 아니라며 꼭 다문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갖다 댄다.

이번 베이징올림픽 기간에 중국에 갈 계획은 없다.

다만 서울올림픽 20주년 행사 때 참석해 그날의 감격을 선배 체육인들도 함께 나눌 예정이다.

지난 4월 성화 봉송 때 시울시청 앞에서 한국 주자로서는 마지막으로 뛴 바 있다.

서울올림픽 때의 굴렁쇠는 지금 올림픽기념관에 있다.

줄곧 자신이 보관하다가 2005년에 기증했다.모두 사람들과 함께 그 기억을 공유하자는 뜻이었다.

그는 지금도 간간이 올림픽기념관을 찾아 굴렁쇠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기곤 한다.

그러면서 다짐한다. '이젠 행복의 굴렁쇠를 짜릿한 감동으로 멋지게 굴려보자'고.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편집위원 id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