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재 < 국제PEN한국본부 이사장 orumplus@hanmail.net >
[한경에세이]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주말이면 아이들이 온다. 큰아들한테는 서현이와 준범이가 딸려있고 작은아들한테는 이은이가 딸려있다. 우리 내외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지 10여 년이 지났어도 아이들이 오면 마냥 즐겁기만 하다. 아직 귀찮다는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먼저 손주놈들 이야기 한 토막씩 옮겨 본다.

단골이 된 낙지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집을 나와 네거리 건널목을 건너면 법원 앞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걷게 된다. 서현이가 갑자기 이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일까? 물어보았다. 예쁜 은행잎이 노랗게 깔려 있는데 이걸 어떻게 밟고 가냐는 것이었다. 감동이었다. 여지없이 서현이의 뜻을 받아 다른 길을 택해서 갔다. 서현이가 다섯 살쯤 됐을 때의 이야기다.

다음은 준범이 이야기. 할머니와 놀이터도 다녀오고 집에서 숨바꼭질도 하고 돼지고기와 생선도 맛있게 먹고 이미 어둠이 왔을 때 대전에서 세종시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창가에 앉아 달을 보며 준범이는, “아까부터 저 달이 우릴 자꾸만 따라온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빠 잠깐만 차 좀 세워보세요. 할머니가 따라오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며느리가 자랑스럽게 전해주는 이야기였다. 이놈도 다섯 살쯤 됐을 때인가 보다.

작년 여름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어느 날이었나 보다. 유모차를 타고 이은이가 왔다.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아직 첫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였으니 할아버지를 반겨 알아볼 리도 없다. 어쩌다가 운 좋게 그런 아이가 할아버지 무릎에 앉았다. 그러고는 할아버지 검지손가락 하나를 꼭 잡고 한참 동안 놓지 않는 것이었다. 그 순간이 진정 행복이었다.

오늘은 어린이날. 고마운 내 손주놈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서 감동으로 익힌 뜻을 달콤하게 상기해본다. 나는 서현이에게서 아름다운 자연과 아름답고 순수한 마음을 다시 익혔고, 나는 준범이에게서 그리움과 사랑의 티 없는 정을 느꼈고, 나는 이은이에게서 혈육의 끈끈한 핏줄을 행복으로 감지했다.

그리고 30년간 대학 강단에서 만나던 영국의 낭만파 시인 워즈워스의 시구를 또 떠올렸다.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마음 뛰누나’로 시작하는 세칭 ‘무지개’에 나오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란 명구다. 그 의미를 다시 새겨본다.

어린이는 자연, 순수, 아름다움, 거룩한 것,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의 상징으로, 어른들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의 무지갯빛 아름다운 마음이 자연의 경건함으로 이어지길 소망한 시인을 그리며 어린이를 받드는 어른의 어린이날을 기대해 본다. 그러면 오월도 한층 빛날 것이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