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 수협중앙회장은 수산업이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가난에 찌들어 있던 1960년대, 어민들이 생계를 꾸리고 잡은 고기 중 좋은 상품을 해외에 수출하며 번 돈이 성장을 위한 ‘종잣돈’이 됐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50년간 수협이 걸어온 길은 한국의 성장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수협은 1962년 4월1일 설립됐다. 그때까지 해안지역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어촌계를 흡수해서 99개 조합과 1개 중앙회 체제로 시작했다. 현재의 경제부문 위주로 운영되던 수협은 1963년, 산업은행과 농협중앙회에서 수산 관련 자금을 인수해 어업인들에게 자금을 빌려주는 업무를 개시하면서 경제·신용부문 양대 체제를 갖춰나갔다.

1960년대 수협은 자체 조직과 사업기반 구축, 낙후된 어촌사회 개발과 어업생산구조 개선을 위한 밑바탕을 마련하는 데 주력했다. 한·일협정으로 인한 대일청구권자금이 수산업부문에 투입됐고, 어업용 유류와 수산용 기초부품에 대한 면세조치(1967~1968년)를 취하는 등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뒤따라 수산업 성장기틀이 다져진 시기다. 1962~1972년까지 우리나라 전체 경제는 연간 8%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수산업부문의 성장률은 이보다 더 높은 연 11.5%였다. 수산물은 주요 수출품목 중 하나였다. 1978년 중앙회의 수출 실적이 1000만달러를 돌파, 그해 수출의 날에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이후 꾸준히 성장 가도를 달리던 수협은 1990년대 중흥기를 맞게 된다. 1972년 임명제로 전환됐던 중앙회장 선출 제도는 1990년 다시 민간 선출제로 돌아갔다. 1990년엔 ‘수협 대약진’ 운동이 벌어졌고 내부 조직과 사업 전 부문에서 양적·질적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에는 급격한 국내·외 정치 경제 상황의 변화로 도전을 받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는 1997년 7월 수협 위판장을 의무적으로 이용하던 제도(강제상장제)를 없애고 자유판매제로 바꿨다. 협동조합 체제의 근간이 흔들린 셈이다. 또 외환위기가 닥쳐 1999년 수협은 9개 도지회를 폐지하는 등 조직을 축소해야 했다. 2001년 4월에는 예금보험공사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하며 공적자금을 지원받았다. 2000년대 들어 수협은 경영정상화에 힘썼다. 노량진수산시장 인수(2001년), 어촌계 자매결연사업 시작(2005년), 태안 기름유출 사건 대응(2007년), ICA수산위원회 위원장국 선정(2009년) 등이 이 시기 주요 사건이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