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작(對酌)한다'고 할 때 작(酌)자 있잖아요? 그게 '술을 따른다'는 뜻 말고 '참작한다'는 뜻도 있거든요. 거기에다 옛 고(古),비롯할 창(創),새 신(新),'작고창신'이라고 하세요. 옛 것을 참고해서 새 것을 만든다는 뜻이니 딱 어울릴 겁니다. "

외출했다가 인터뷰 시간에 맞춰 서울 종로구 명륜동 유림회관으로 돌아온 최근덕 성균관장(76)이 휴대전화로 이렇게 일러준다.

아마 누가 휘호나 표어로 쓸 구절을 문의했던 모양이다. 어디서 걸려온 전화냐는 물음에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비밀!"이라고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평소 자주 입던 한복 두루마기 대신 양복을 입은 까닭을 묻자 그 안에 깃든 '작고창신'의 뜻을 설명해 준다.

"옛날엔 음력이 모든 기준이었지만 지금은 양력을 쓰게 된 것처럼 유교도 큰 정신은 변하지 않되 지엽적인 것은 역사성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갓 쓰고 도포 입은 유림은 조선시대에나 있었지 공자님이 갓 쓰고 살지는 않았잖아요? 양복은 이 시대의 옷이니 유림도 이 옷을 입고 이 시대의 생활습관을 참작해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지요. 우리 성균관이 지향하는 유교 현대화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

민족의 명절인 설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한국교통연구원이 전국의 6800세대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설 연휴 기간의 지역 간 이동인구는 2800만여명.명절 연휴에 해외로,휴양지로 가는 사람들도 많지만 해마다 지옥 같은 '귀성전쟁'을 치르면서도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은 들뜨고 설렌다.

설을 앞두고 전통문화 보존과 유교정신에 바탕한 윤리 회복에 앞장서고 있는 최 관장을 만나 설의 의미와 설을 맞는 자세 등에 대해 들어봤다.

오늘날 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서양에선 우주를 '코스모스(Cosmos)'라고 해서 한없이 펼쳐진 공간을 이야기합니다만 동양에서 말하는 우주는 다릅니다. 우(宇)는 상하(上下) · 사방(四方),즉 하늘과 땅과 동서남북의 육합(六合)을 말하는 것이고,주(宙)는 왕고내금(往古來今)을, 시간을 뜻하는 것이니 동양의 우주는 시간과 공간을 합친 개념입니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것이 이 우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주 안에 깃든 모든 것도 끝없이 변화하게 마련입니다.

설의 의미도 그렇지요. 현대 사회에서 설은 시간의 개념에서 많이 멀어진 게 사실입니다. 예전에는 설을 새해의 첫날로 축하하고 한 해의 다짐도 하고 그랬지만 양력을 쓰다 보니 지금은 그야말로 전통사회에서 지키던 민속의 하나로 남았지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음력 정월 초하루를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는 유림들도 있지만 꼭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니죠.가는 것은 보내고 새 것은 받아들이는 게 마땅합니다. 작고창신해서 옛 분들이 어떤 몸가짐으로 조상을 받들고 전통을 존중해왔는지 그 정신을 배우고 지켜야지요. "

설은 어디서 보내십니까.

"제자나 후배들의 세배는 양력 설에 받습니다. 전에는 집에서 세배를 했는데 이제는 늙은 안사람이 많은 손님을 치를 수가 없어 유교학술원에서 합니다. 지난 1일에도 60~70명이 모였지요. 대신 음력 설에는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성균관에 와서 초하루 분향을 합니다. 유림들과 세배를 나누고 떡국을 먹으면서 술도 한 잔 하지요. 저녁엔 자녀와 친척들이 모입니다. "

명절이 되면 가족과 일가 · 친척들을 만나 반갑긴 한데 뒤끝이 좋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반갑게 모여서 술 한 잔 하다 보면 할 소리,안 할 소리 다 해서 그렇죠.싸움은 주로 돈 있는 집에서 하지 가난한 집은 오히려 우애가 깊어져요. 도덕성이 결여된 졸부들은 돈,돈 하다 보니 형제간에 우애가 없거든요. 가정이 파괴되는 것도,경제위기도,지구의 종말이나 환경문제,식품안전문제도 다 도덕성이 결여된 탓입니다. 세계적 석학들도 미국발 경제위기가 도덕이 붕괴된 탓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돈 벌 생각만 하니 공해를 유발하고,해로운 식품도 만들고 하는 겁니다. "

명절 차례와 제사에도 많은 변화가 오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변화의 방향은 뭐라고 보십니까.

"4대 봉제사(奉祭祀)를 하려면 1년에 8차례나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그러자면 주부들이 너무 힘들어요. 따라서 2대까지만 제사를 지내고 그 윗대는 산소에 성묘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게 좋습니다. 또 이상하게도 종가나 4대 봉제사를 하는 집에선 남자들은 물러나 있고 여자들만 죽어라 일을 하는데 제사나 명절 차례는 남자들도 적극 협조해서 함께 준비해야 합니다. 제사나 차례를 꼭 장남 집에서만 지낼 필요도 없어요. 차남이든 막내든 딸이든 누구 집에서 지내도 괜찮습니다. 가족회의를 거쳐 형편대로 하면 돼요. 제사 비용도 한 집에서만 부담할 게 아니라 모든 친족들이 함께 부담하고,제수도 술 · 부침개 · 떡 · 전 등을 집집마다 분담해서 준비하면 편하지 않겠어요?"

차례나 제사가 종교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하는데요.

"제사는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는 것이므로 종교적 신념과 무관합니다. 공자님은 '제여재(祭如在)'라,조상님이 그 자리에 계시는 듯 제사를 지내라고 했습니다. 제사 음식은 무슨 신이 와서 먹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계신 듯 조상에 대한 추모의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차례나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하지만 신을 모시는 게 아니라 조상님이 계신다고 생각하고 추모의 뜻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니까 싸울 이유가 없지요. "

관장님 말씀을 들어보면 '유교는 가부장적이고 고리타분하다'는 통념과는 거리가 있어보이는데요.

"유교가 가부장적이라는 얘기는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유교와 민속 혹은 전통사상을 구별하지 못한 채 무조건 덮어씌운 겁니다. 유교는 인간적인 도덕체계요 인간중심의 사상입니다. 그래서 인(仁)이 근본사상이잖아요. 사람 인(人)과 두 이(二)로 된 仁(인)은 두 사람,즉 너와 나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인데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친친애인(親親愛人)이라,가까운 데서부터 사랑을 실천해 다른 사람에게도 그 사랑이 미치게 하면 됩니다. 내 아버지를 사랑해서 그 사랑이 남의 아버지에게도 미치게 하고,내 아이를 사랑해서 그 사랑이 남의 아이에게도 미치게 하는 거지요. "

유교는 원래 보수적인가요.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동양의 우주 만물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하는 것입니다. 유교의 철학서인 '주역(周易)'의 '역(易)'이 변화를 의미하는 것 아닙니까. 세상 모든 것은 변하며 변해야 산다는 '변혁의 철학'이 바로 유교철학입니다. 조선의 대(大)철학자인 율곡과 퇴계도 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만 조선은 변하지 않으려다 결국 망한 것입니다. "

지난 연말 연초 국회에서 일어난 물리적 충돌이 국민들을 실망시켰습니다.

"한마디로 저질 정치입니다. 국회를 '의정단상'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의논해서 일을 처리하기 때문인데 숫자로 밀어붙이는 여당이나 물리력으로 대응하는 야당이나 대화나 의논보다는 '억지'를 부렸습니다. 그건 '의정'이 아니라 '투정(鬪政)'입니다. 공자님은 '政者正也(정자정야 · 정치는 바른 것)'라고 했습니다. 서로 설득하고 논의해서 합의점에 도달해야지 여당은 힘 과시로,야당은 투쟁력으로 지지를 받으려는데 그건 바른 길이 아니지요. "

경제위기로 모두가 힘든 한 해를 맞고 있습니다. 이 위기를 잘 극복하도록 덕담 한마디 해 주시죠.

"주역에서 말하기를 '하늘의 운행은 강건하다. 군자는 이를 체득해서 스스로 쉬지 않고 힘쓴다(天行健 君子以自强不息)'고 했습니다. 모두가 스스로 힘써 끊임없이 마음을 다지고 노력한다면,우리 민족 특유의 은근과 끈기로 애쓴다면 이 정도 위기쯤 충분히 극복할 수 있어요. 자기의 이익만 좇지 말고 남을 배려하는 인의 기풍을 진작하고 모두가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다면 극복하지 못할 위기나 난국은 없습니다. 서로 용서하세요. "

글=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사진=양윤모 기자 yoonmo@hankyung.com

● 약력
△1933년 경남 합천 출생
△1955년 진주농림고 졸업
△1955년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입학
△1976년 한국소설가협회 창립
△1983년 성균관대 부교수
△1987년 성균관대 유학대학장,유학대학원장
△1992년 포은사상연구원장,유교학회장
△2001년 유교학술원장
△현 성균관장,호서학원 이사장,한국종교인평화회의 대표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