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소리가 너무 좋아 '소리의 비밀'을 찾겠다며 가출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2년째 기타를 만들고 있네요. "

계룡산이 눈앞에 병풍처럼 펼쳐진 충남 공주시 반포면에서 수제 기타 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이형규씨(52)는 평생 한 우물을 파온 '기타 장인'이다. 그는 국내 수제기타 제작의 1인자로 꼽힌다. 아직까지 국내 연주자 및 각 대학의 기타전공자들 가운데 90% 정도가 외제 수제기타를 쓰고 있지만,나머지 10%는 그의 '작품'을 사서 연주한다. 그의 명성은 기타의 본고장 유럽에까지 알려져 있다. 매년 1000만원이 넘는 수제기타 10대 이상을 독일과 영국에 내보내고 있다.

'기타 장인'의 '기타 인생'은 처음엔 무모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씨는 무작정 가출해 서울 뚝섬의 한 악기제작소에 취직한다. "악기제작소에서 일을 배우던 중 당시 서울시내 집 한채 값에 해당하는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수제기타가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큰돈을 만지려면 '바로 이거다' 싶어 수제기타에 인생을 걸기로 마음 먹었지요. "

하지만 수제기타 제작 기술을 배우고 싶어도 당시 국내에선 배울 길이 없었다. 기타 제작 기술이 고작 기계로 붕어빵처럼 찍어내는 저급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이씨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회사 측과 기술 자문을 하던 미국인 기술자를 알게 됐다. 그를 졸라 미국 필라델피아로 건너간 이씨는 세계적 악기 제작사인 마티니사에서 본격적인 기타 제작 수업을 받았다.

"미국 악기시장에서 10억원짜리 수제기타까지 거래되는 걸 보고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나도 세계 최고가의 기타를 만드는 장인이 되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밤낮없이 일을 배웠습니다. " 얼마나 일에 푹 빠졌던지 6년이란 세월이 흐를 동안 군대가는 것도 까맣게 잊을 정도였다.

26세라는 늦은 나이에 귀국해 병역을 마친 그는 30세도 채 안 된 나이에 '소리나'라는 기타 제작 회사를 차렸으나 시장이 좁은 데다 마케팅 능력마저 떨어져 곧 문을 닫았다. 32세에 대전으로 내려온 그는 이때부터 '이형규'라는 브랜드로 본격적인 수제기타를 만들기 시작했다.

"본고장에서는 우리와는 달리 악기를 만드는 마음가짐부터가 달랐습니다. 하나하나 작품이라는 개념으로 만듭니다. 악기를 만든 사람의 철학이 소리로 표현되지요. "

그는 국내 제작가로는 처음으로 199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뮤직 메세에 참가,작품을 선보였고 이후 미국 LA기타페스티벌과 상하이 국제악기쇼 등에도 잇달아 출품해 호평을 받았다. 구매자와 문화코드를 맞추기 위한 노력이다. 베리캔,그리피우스 등 유럽의 악기 명인들과 교류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공주=백창현 기자 chbai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