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을 발랐으니 이제 연지도 발라봐"

보옥이 백옥으로 만든 연지갑을 평아에게 내밀며 재촉하자 평아가
빙긋이 웃으며 연지갑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그동안 종이 연지, 즉 종이에 발라진 연지를 사용해왔던 평아는
다른 모양으로 된 연지를 보고는 어떻게 사용을 할지 몰라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점방에서 파는 거 하고는 질이 달라. 상등 연지 재료의 즙을
짜서 찌꺼기를 말끔히 없애고 꽃잎들을 우린 물에대 섞어 쪄낸 거야.

그러니까 이걸 바를 때는..."

보옥이 아예 평아의 얼굴에 연지를 발라줄 채비를 하였다.

우선 보옥이 평아의 머리에 꽂힌 가는 비녀 화잠을 뽑아서 그 끝으로
연지갑의 연지를 조금 떠내어 손바닥에 옮겨 놓고 물을 몇 방울 떨어뜨려
문지르고 나서 검지 손가락에 찍어 올렸다.

"자, 입술을 내밀어봐. 내가 연지를 발라줄게"

평아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더니 습인을 돌아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습인은 보옥 도련님이 또 저러면 안되는데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평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얼른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괜찮아. 보옥 도련님이 너를 위로해주려고 그러는 거니까.

그리고 도련님 화장 실력이 여자들 뺨친다니까"

그러고는 습인이 할 일이 있는 듯 슬쩍 자리를 피해버렸다.

평아가 두 눈을 감고 턱과 입술을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

보옥이 평아의 입술에다가 손가락에 묻은 연지를 정성스럽게 발라주었다.

평아는 보옥의 손가락이 입술을 스치는 감촉이 너무 좋아 그만 보옥의
손가락을 입으로 물어버리고만 싶었다.

어쩌면 이렇게 부드럽고 예쁜 입술을 가지고 있을까.

보옥은 속으로 감탄을 하며 평아의 입술을 와락 깨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자, 이제 입술은 됐고, 손바닥에 남아 있는 것으로는 뺨에다 발라줄게"

보옥이 두 손바닥을 비비더니 평아의 얼굴에 대고 가볍게 문질러
주었다.

평아의 두 뺨이 발그레해지면서 더욱 어여쁘게 되었다.

희봉 형수가 시샘을 할만도 해.그리고 가련 형님이 이런 미녀 시녀를
가만 둘 리가 없겠지. 보옥이 평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꽂잎이 열리 듯 평아가 맑은 두 눈을 슬며시
뜨면서 배시시 웃었다.

"나, 이뻐요?"

"그럼. 너무 예뻐.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는 걸"

보옥은 평아가 자기 시녀가 아닌 것이 원통하기까지 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