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아트홀 내한 리사이틀…개성 있는 해석·미묘한 의외성으로 관객 사로잡아
슈베르트 소나타의 정수 보여준 폴 루이스
영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인 폴 루이스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만으로 내한공연의 프로그램을 채웠다.

지난 9일 서울 금호아트홀연세에서 열린 루이스의 무대는 슈베르트 소나타의 정수(精髓)를 모두 보여준 자리였다.

1부에는 흔히 '유품'이라는 부제로 불리는 소나타 15번 다장조(D.840), 13번 가장조(D.664) 두 곡을, 2부에서는 16번 가단조(D.845)를 선보였다.

이 세 작품은 이미 원숙기에 오른 슈베르트의 작품들이다.

1819년 나온 13번에는 아직 순수하고 천진한 슈베르트 본연의 노래다움이 살아 있지만 이미 불의의 질병을 얻고 난 뒤인 1825년 작 15번과 16번에는 후기 슈베르트의 특징인 충격과 단절, 고독감이 묻어난다.

루이스는 과장된 제스처 없이도 듣는 이들을 슈베르트 음악에 몰입시켰다.

처음으로 연주한 15번 소나타에서부터 그는 슈베르트 특유의 떠도는 듯한 움직임을 훌륭하게 형상화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에는 유독 안단테나 모데라토 정도의 빠르기가 많이 등장하고, 알레그로의 경우에도 빈 고전주의에 비해 활달하거나 외향적이기보다는 걷는 속도보다 조금 빠른 경우가 많다.

2악장까지만 완성된 이 '유품' 소나타도 그러한데, 루이스는 겉으로는 빠르지 않은 템포 안에 다양한 변화를 줘서 정중동(靜中動)의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이와 더불어 1악장에서는 배경이 되는 화성 속에서 선율을 묻어두었다가 전면에 드러내기를 반복하면서 입체적인 효과를 잘 살려냈다.

2악장은 슈베르트 특유의 서정적 선율과 반복적 구조, 점진적 변화가 인상적으로 어우러진 악장이다.

루이스는 매우 예민하게 반복되는 소절의 셈여림과 빛깔에 미묘한 차이를 표현해냈다.

우수 혹은 애상 어린 선율이 음계를 타고 오르며 점차 강렬해지는 1주제, 온화하고 정적인 2주제는 그 자체로는 대비되면서도 하나의 일체를 이루도록 세심하게 연주했다.

13번 소나타 또한 높은 완성도를 보여줬다.

아직 낭만주의적 순수를 간직한 이 작은 작품에서는 다소 모차르트를 연상시키는 경쾌함과 유희적인 본능이 밝은 인상을 줬다.

루이스는 15번과 완전히 다른 음색과 빛깔로 연주에 임했다.

1819년과 1825년 사이의 변화를 암시하듯 보다 맑고 천진한 울림과 다정한 톤이 인상적이었다.

또 놀라웠던 것은 피아노 소나타임에도 성악부를 비워 놓은 리트(Lied·독일예술가곡)처럼 일종의 빈자리를 느끼게 하는 그의 상상력이었다.

약간의 머뭇거림, 음악적 공간이 다 채워지지 않는 부재의 인상이 이 소나타의 매력을 한층 더 드러냈다.

특히 2악장에서 훌륭했던 것은 강약약으로 반복되는 리듬이었는데, 이 리듬은 율격상 보통 고조를 동반하지만, 슈베르트의 작품에서는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의 영향으로 오히려 내적으로 침잠한다.

루이스는 이런 점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연주에 임했다.

전반적으로 템포 상의 유연성을 갖추고 있어 나아감과 멈춤 사이의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또한 순간적인 극명한 변화를 만들어낼 줄 알았다.

슈베르트 소나타의 정수 보여준 폴 루이스
2부를 채운 16번 소나타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루이스는 2부에서도 듣는 이의 예상을 벗어나려는 다양한 전략을 효과적으로 건반 위에서 실행했다.

성악적이고 노래다운 서정성과 기악적이고 화성적인 구조의 힘 가운데 어떤 것을 전면에 내세울지를 악구마다 세심하게 조절했다.

전반적인 템포는 빠른 편이었지만 디테일을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1악장에서는 후기 슈베르트의 특징적인 갑작스러운 단절, 공포 어린 타격, 루이스 자신의 표현대로 열정적인 분노가 제대로 표출됐다.

그 표현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듣는 이에게 예상을 넘어서는 신선한 의외성으로 다가오기에 충분했다.

또한 2악장은 짐짓 즐겁게 들리는 선율이지만, 어딘가 쫓기는 듯한 템포로 연출하고 다음의 침잠하는 어두운 독백조의 악상을 대비시켰는데 그 효과 또한 탁월했다.

그로 인해 첫 주제의 즐거움은 꾸며낸 것이고 더 깊은 내면에는 고통이 숨겨져 있다는 후기 슈베르트 특유의 심리가 아주 훌륭하게 전달됐다.

공연 전반의 질과 기술적 수준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귀감이 됐던 것은 연주자가 작품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콘셉트를 갈고 닦았다는 점이었다.

규칙성을 자꾸 벗어나며 긴장감을 유발하는 3악장, 한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색채와 음영에 변화를 주는 4악장도 뛰어났다.

그야말로 슈베르트 소나타의 정수를 다 보여줬다고 할 만한 공연이었다.

이날 관객들은 루이스가 선보인 슈베르트에게 완전히 몰입했다.

집중도가 매우 높은 공연이었고, 연주자와 교감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루이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슈베르트의 서정성과 후기의 어두움을 잘 드러내면서도 자신만의 개성 있는 해석과 긴장감을 자아내는 미묘한 의외성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초절기교나 화려함 없이 작곡가에 대한 온전한 헌신만으로도 이만큼 강렬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음을 폴 루이스의 리사이틀은 분명하게 증명해 보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