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사실주의 화가 윤병락 씨가 경기도 일산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 ‘가을향기’ 시리즈를 내보이며 웃고 있다.
극사실주의 화가 윤병락 씨가 경기도 일산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 ‘가을향기’ 시리즈를 내보이며 웃고 있다.
윤병락 씨(47)는 정교한 묘사의 극치를 보여주는 하이퍼리얼리즘(사진처럼 정교하게 그린 그림)의 40대 대표작가다. 그의 사과 그림에는 인간의 풍요와 욕망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잔잔한 빛과 색감이 화면 깊숙이 끼어들고 정적과 평안, 고요를 마음껏 발산한다. ‘사과보다 더 사과’ 같아 사진처럼 보인다. ‘눈에 보이는 것이 곧 사실’이라는 믿음마저 흔들어 놓는다.

경북대 미대를 졸업하고 2007년 ‘화단의 영스타’로 떠오른 윤씨는 전시회 때마다 컬렉터들이 몰려 작품의 60~70% 이상이 팔리는 몇 안 되는 ‘행복한 작가’다. 그의 작품은 현대인들의 모방 본능을 사과에 표현한 독창성 때문에 국내외 아트페어에 출품하기 무섭게 팔려 나간다. 지난달 노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도 출품작 20여점이 모두 팔려 ‘불황을 모르는 작가’로 화제가 됐다. 최근 8년간 홍콩크리스티 경매에서도 출품작 5점이 모두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요즘도 작품 주문이 밀려들어 연말까지 예약이 끝난 상태다.

대학 4학년 재학 중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에 당선될 정도로 묘사력이 뛰어난 윤씨는 “그동안 미술계에서 쌓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올해부터 2년간 ‘현대미술의 1번지’ 뉴욕 진출을 준비할 것”이라며 “미술 교과서에 영원히 실리는 작가로 거듭나겠다”고 말했다. ‘한국의 세잔’을 꿈꾸는 그는 “미국과 유럽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사과 그림으로 뉴욕 현지 화랑과 접촉을 시도하는 중”이라며 “홍콩 경매 기록이 있는 만큼 미국 진출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그림을 처음 시작한 1980년대에는 그림 철학이 확고하지 않았지만 50세를 눈앞에 둔 지금은 어느 정도 미학적인 개념이 잡히는 것 같다고 그는 자평했다.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초현실주의 화풍의 ‘인체’ 시리즈를 시작으로 고구려 기상과 한국 여인상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그림을 거쳐 2003년 이후 전통 한지에 서양 물감을 쓴 ‘퓨전 한국화’ 사과 그림으로 진화해 왔다. 한국 여인의 혼이 담긴 반닫이 그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청와대 집무실에 걸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그의 그림은 중·고교 미술과 국어 교과서 등 8곳에 실려 있다.

극사실적 기법과 사과 상자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법으로 사과를 훨씬 입체적으로 그려낸 ‘윤병락 표’ 그림이 이처럼 인기를 끄는 까닭은 뭘까. 가장 큰 요인은 세대를 아우르는 ‘결실과 행복’을 감성적으로 터치하는 것이다. 결실의 계절에 느끼는 포만과 행복 등 풍부한 감성의 나래를 상상의 밑뿌리로 어루만진다. 작품 제목이 ‘가을 향기’인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인들의 향수를 자극한 것도 한 요소다. 그는 “고향 경북 영천에서 자란 기억과 농사의 소중함에서 예술의 원천을 뽑아낸다”고 했다. “벼농사를 하는 부모님의 소중한 땀방울을 보며 자랐어요. 곡식은 땅이라는 캔버스에서 쉬지 않고 노동해야 잘 영글듯이 예술 역시 ‘영혼의 지문 같은 손맛’으로 쉼 없이 노력해야 아름다움이 깃드는 것 같아요.”

이처럼 10대나 20대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시각예술로 전해주고 중·장년층에는 유년시절의 땀방울을 되새기게 한 것이 주효했다. “제 작업은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감성을 접목하고 이를 하나의 이미지로 승화시키는 것이지요. 제 작품에는 노랫말처럼 내레이션이 담겨 있습니다.”

기법의 특이함도 미술 애호가들을 끌어들이는 또 다른 이유다. 나무판 위에 삼합지 이상의 두꺼운 한지를 붙이고 그 위에 유화 물감으로 두세 차례 덧칠을 한다. 작업실에서 사과를 깎기도 하고 궤짝을 옆으로 쏟기도 하면서 다양한 변형구도를 만들어낸다.

극사실주의 화풍인 만큼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세밀하게 작업하기 때문에 품과 시간이 많이 든다. 1.6m 크기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꼬박 보름이 걸린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