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주영씨(63)의 새 장편소설 '멸치'(문이당)가 연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우선 제목부터 얘깃거리.지난 98년 대산문학상 수상작 '홍어'에 이어 작고 보잘것없는 어족인 '멸치'를 상징 이미지로 내세웠다. 김주영 문학의 농밀함을 좋아하는 독자들로부터 "밥상 한 귀퉁이에 날마다 오르는 하찮은 멸치가 이렇듯 웅숭깊은 작품으로 되살아나다니….내친 김에 물고기 이름을 제목으로 하는 소설을 시리즈로 내는 것은 어떠냐"는 제안(?)까지 잇따르고 있다. 하긴 물고기 이름을 제목으로 딴 작품들은 그동안에도 많았다. '고등어'(공지영) '은어낚시통신'(윤대녕) '빙어가 올라오는 계절'(박경철) '연어'(안도현) '가시고기'(조창인) '마녀 물고기'(이평재) '당신의 물고기'(함정임)….춘천에만 산다는 '무어'라는 고기는 이외수씨의 '황금비늘'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김씨의 이번 작품에서 사실 멸치는 주인공이 아니다. 작품 마지막에 환상적인 멸치떼의 군무로 모습을 나타낼 뿐이다. 소설의 줄기는 성장기 소년의 눈에 비친 삶의 의미와 가족,부권과 모성의 접점으로 이어진다. 전작 '홍어'에서 집나간 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어머니와 어느 날 눈보라처럼 날아온 삼례라는 여성을 등장시켰지만 이번에는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아버지와 외삼촌이 그 자리를 메운다. 어머니의 의붓동생인 외삼촌은 외조부와 절연한 채 유수지 앞 움막에서 지낸다. 열네살인 '나'는 외삼촌과 보이지 않는 끈끈함으로 교감하면서 아버지와 앙숙인 그의 남모르는 배려로 가족의 의미를 내밀하게 느낀다. 두사람 사이를 오가며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고대하는 소년의 성장 일기다. 이 소설은 가족의 허상을 짚어내면서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여기에 작가 특유의 서정적인 문체가 어우러져 완성도를 높인다. 종달새 알을 찾는 강가의 매복,유수지의 눈부신 물밑 세상,외삼촌이 기르는 염소와 야생 너구리,마지막 멧돼지 사냥길에 그려진 사랑의 은유. 30여년간 다듬어 온 작가의 내공으로 멸치에서 척추동물의 삶을 비춰내는 역량도 특별하다. 마치 긴긴 겨울밤 오래 가는 군불처럼 따뜻하게 읽히는 작품이다. '멸치는 제일 작지만 고래보다 강직하고 담대한 어족이다. 내장까지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몸체로 일생을 살면서도 알을 밴 흔적만은 감추는 은둔자의 삶을 산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