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주 특허청장, IP-R&D 사업 현장점검 박원주 특허청장이 IP-R&D 사업에 참여한 기업 포인트엔지니어링을 방문해 성과를 점검하고 있다.  특허청 제공
박원주 특허청장, IP-R&D 사업 현장점검 박원주 특허청장이 IP-R&D 사업에 참여한 기업 포인트엔지니어링을 방문해 성과를 점검하고 있다. 특허청 제공
#자전거용 솔리드타이어(공기 없이 고무로만 된 타이어) 제조업체 A사. 대만의 후발주자 B사로부터 위협을 받던 A사는 자사 특허를 보호할 수 있는 IP-R&D(지식재산 연구개발)사업에 참여했다. 이 사업을 통해 타이어와 관련된 세계 특허 5만2000여 건을 분석하면서 새로운 솔리드타이어 제조 기술을 개발하고, B사 등 경쟁사를 공격할 수 있는 핵심특허 3건을 확보했다. A사는 미국 등 전 세계 고급 자전거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업체 C사와 수출 계약을 맺으면서 이 특허를 바탕으로 B사의 진출 가능성을 봉쇄했다.

특허청이 지원하는 IP-R&D 사업이 기업들에 인기다. IP-R&D는 연구개발 초기부터 특허 정보를 활용해 최적의 기술 개발 방향을 제시하고, 경쟁사의 특허를 회피하면서 우수 특허 창출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특허청 관계자는 “IP에 대한 거시적 전략 없이 R&D를 진행한 후 무작정 특허를 등록해놓으면 막상 특허 침해 분쟁이 발생했을 때 사용할 수 없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개발하려는 제품과 관련된 모든 특허를 찾아 분석해 경쟁사의 특허를 회피하는 법을 찾고, 아직 특허가 등록되지 않은 공백 영역에 특허를 선점하는 것이 좋다”고 덧붙였다.

주먹구구식 R&D는 그만

특허청은 2009년 IP-R&D 사업을 시작해 지난해까지 1700여 개의 중견, 중소기업과 500여 개 대학, 공공연구소를 지원했다. 특허청에 따르면 이 기간 IP-R&D 사업에 참여한 중소기업의 삼극특허(국내 특허와 동일한 발명이 미국·유럽·일본에 동시 출원) 비율은 4.1%로 일반 R&D의 삼극특허(1.3%)보다 세 배 이상 많았다. 대학과 공공연구소는 IP-R&D 지원을 받았을 때 기술이전 계약 건당 기술료가 7710만원으로 그렇지 않은 경우(2570만원)의 세 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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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허청 산하 한국특허전략개발원은 10여 년째 이어진 IP-R&D 사업의 가장 두드러진 성과로 인공지능(AI) 스타트업 수아랩을 꼽았다. 수아랩은 지난해 미국 나스닥 상장사 코그넥스에 약 2300억원에 인수됐다. 국내 스타트업 인수합병(M&A) 사례에서 손꼽히는 높은 금액이다.

수아랩은 제조업체 공장에 AI 딥러닝 기반 머신비전(기계가 사물을 인식하는 솔루션)을 공급하고 있다. 불량품을 자동으로 찾아주는 이미지 인식 소프트웨어 ‘수아킷’이 대표 제품이다. 삼성전자 LG전자 등이 이를 사용하고 있다.

수아랩은 2017년, 2019년 두 차례에 걸쳐 IP-R&D 사업에 참여했다. 2017년 지원 과제명은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통한 이미지 데이터 변칙 감지 관련 소프트웨어 특허 조사 및 로드맵 확립’, 2019년은 ‘다면체 외관을 딥러닝으로 검사하기 위한 로봇 장치’였다. IP R&D 사업 참여 이전엔 세 건에 불과했던 수아랩 특허 출원은 이후 27건으로 급증했다. 특허전략개발원 관계자는 “27건 특허 중 대부분이 IP-R&D사업의 직간접적인 결과물”이라며 “수아랩이 강력한 특허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는 데 IP-R&D 사업이 일조했다”고 말했다.

IP-R&D로 생산능력 10배 끌어올려

중견기업도 IP-R&D에 참여하는 사례가 많다. 현대자동차그룹에 시트커버, 선바이저 등 자동차 내·외장재를 공급하는 주식회사 용산은 2017년부터 2년 연속 이 사업 지원을 받았다. 중국, 인도, 멕시코 등 사업장을 포함한 지난해 연결매출이 5515억원에 달하는 중견기업이다.

용산은 자동차 계기판과 각종 버튼이 설치돼 있는 인스트루먼트 패널(일명 대시보드)을 가죽으로 감싼 제품을 현대차그룹에 납품했다. 2017년 고급차량 확대전략에 따라 현대차그룹이 2020년까지 연 20만 대 이상 가죽 인스트루먼트 패널 생산체계를 갖출 것을 용산에 요구했다. 그러나 이 패널은 숙련공의 수작업이 필요해 연 생산능력이 4만여 대에 불과했다. 용산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독일 자동차업체에 기술 이전을 타진했으나 고가라 포기했다. 용산은 수소문 끝에 2017~2018년 IP-R&D 사업에 참여했다. 가죽재료 전처리, 감싸기 등 숙련공 없이도 작업 시간 단축이 가능한 독자 기술을 개발하고 관련 특허를 확보했다. 이를 생산라인에 적용해 보니 당초 목표인 연 20만 대를 뛰어넘는 50만 대 이상 생산이 가능해졌다.

특허청은 IP-R&D 사업 범위를 소재·부품·장비 분야로 확장할 방침이다.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관계부처와 비용을 분담해 올해부터 내년까지 500여 개 과제에 IP-R&D 사업을 지원하기로 했다. 선도기업 특허 등으로부터 도출한 소재 조성물 정보(성분, 배합비율, 물성 파라미터 등),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소멸특허 정보 등을 제공한다. 특허청 관계자는 “업종, 분야별 다수 중소기업이 공통적으로 마주치는 애로기술, 필요로 하는 신기술에 대한 특허 전략을 마련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감염병 치료제 및 백신, 비대면 기술(디지털 헬스케어, 온라인 교육, 화상회의 및 원격근무) 등 이른바 ‘포스트(post) 코로나’ 기술 분야도 지원을 강화할 예정이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