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사진=로이터=연합뉴스
빌 게이츠./사진=로이터=연합뉴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제프리 엡스타인에게 겁박당한 사실이 폭로됐다. 엡스타인이 게이츠의 불륜 사실을 포착해 그를 협박했다는 것이다. 엡스타인 스캔들이 미국 재계를 휩쓸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21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엡스타인이 생전 게이츠 MS 창업자를 겁박했다고 보도했다. 게이츠가 2010년께 20대 러시아 브릿지 선수와 교제했다는 것이다. 브릿지는 포커 게임의 일종이다. 엡스타인이 생전 이를 포착한 뒤 2017년부터 게이츠를 겁박했다는 주장이다.

미국 억만장자 헤지펀드 매니저였던 엡스타인은 1990년대부터 10대 소녀 수천 명을 끌어들여 성 착취한 죄로 교도소 수감 중 2019년 극단적 선택을 했다. 2006년 14세 소녀를 꾀어내 학대한 사실로 기소됐으며, 2008년에는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로 유죄를 받았다. 2019년 재차 성매매 혐의로 체포된 뒤 판결이 나기 전에 목숨을 끊었다.
빌 게이츠, '불륜 폭로' 앱스타인에 협박 받았다
WSJ에 따르면 엡스타인은 2013년 러시아 브릿지 선수 밀라 안토노바에게 코딩스쿨 등록비를 제공해줬다. 2017년 엡스타인은 게이츠에게 이메일을 보내 이 비용을 환급해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엡스타인은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최고경영자(CEO)와 함께 수십억 달러 규모의 자선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게이츠에게도 자선기금을 모금하려 했지만 실패하자 협박했다는 분석이다.

게이츠와 엡스타인의 관계는 깊은 편으로 알려져 있다. 둘은 2011년부터 지속해서 만남을 가져왔다. 뉴욕에 있는 엡스타인의 타운하우스에서 6차례 이상 회담을 가졌다. 2013년 3월 게이츠는 엡스타인이 제공한 전용기를 타고 뉴저지에서 플로리다로 이동하기도 했다. 같은 달 둘은 프랑스에서 노벨평화상 위원회 관계자와 회동하기도 했다

게이츠 측 대변인은 이날 "게이츠는 오직 자선 사업 목적으로만 엡스타인을 만났다"며 "반복적으로 게이츠를 끌어들이는 데 실패한 엡스타인이 과거 관계를 이용하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해명했다.

게이츠와 안토노바가 만나게 된 계기는 브릿지 게임이다. 게이츠는 어릴 적 부모로부터 브릿지 게임을 배웠다. 성인이 된 뒤에도 취미가 됐다. 브릿지 선수 밀라 안토노바와도 종종 브릿지 게임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께 20대였던 안토노바는 게이츠와 브릿지 게임을 대결했다.

WSJ에 따르면 안토노바는 당시 브릿지 게임을 전파하기 위한 온라인 교육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50만달러 규모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게이츠의 측근이자 보리스 니콜릭 빌앤드멜린다 게이츠재단의 과학고문과 만났다. 니콜릭은 안토노바를 엡스타인에게 소개해줬고 엡스타인은 물심양면 안토노바를 지원했다. 다만 엡스타인은 이 사업에 투자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밀라 안토노바는 게이츠와의 관계에 대한 논평을 거부했다. 다만 그는 "엡스타인을 처음 봤을 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며 "그가 한 일이 역겹다"고 밝혔다.

투자 유치에 실패한 안토노바는 직접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려 했다. 때문에 프로그래밍 부트 캠프에 지원했고 지인들에게 등록금을 빌리려 했다. 이 때 엡스타인이 아무 조건 없이 등록금을 지원해줬다.

엡스타인은 JP모건과 함께 수십억 달러 규모의 자선기금을 조성하고 있었다. 성범죄 혐의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려는 의도다. JP모건에 자산가 1인당 최소 1억달러 기부금을 모금하고, 수 백만 달러의 수수료를 지불하는 조건이었다. 자선기금 조성의 성공 여부는 게이츠에게 달려있었다.

WSJ이 엡스타인의 개인 이메일을 분석한 결과 2011년부터 엡스타인은 게이츠의 불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JP모건의 경영진에 단체 이메일을 전송하며 "본질적으로 자선기금은 빌의 결혼생활이나 재단 직원들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인재 유치, 거버넌스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썼다.

JP모건 대변인은 WSJ에 "JP모건은 엡스타인이 필요하지 않았다"며 "그가 행한 범죄를 고려하면 애초에 그와 거래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게이츠와 JP모건, 엡스타인의 관계가 깨진 건 2013년부터였다. 당시 엡스타인은 게이츠가 소아마비 박멸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탈 수 있다고 설득했다. 게이츠와 엡스타인은 2013년 3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노벨평화상 위원장을 역임하던 토르비욘 야글란트를 만났다. 엡스타인이 둘 사이에 다리를 놔준 셈이다.

하지만 게이츠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엡스타인과 JP모건이 수 년간 추진했던 자선 기금도 무산됐다. 셋의 관계가 와해한 뒤 2017년 엡스타인은 브릿지 게임 선수 안토노바를 이용하려 했다. 게이츠에게 코딩 스쿨 등록비를 환불해달라는 이메일을 보낸 것이다.

한 소식통은 WSJ에 "엡스타인은 안토노바와 게이츠 사이에 벌어진 사건을 알고 있었고, 이를 폭로할 수 있다는 뉘앙스로 게이츠에게 이메일을 썼다"고 밝혔다. 다만 게이츠 측 대변인은 "둘 사이의 금전적 거래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