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테러와 불법 이민 대책을 이유로 유럽에서 전자 주민카드 도입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소설 '1984년'에서 '빅 브러더' 사회의 출현을 예고했던 조지 오웰의 조국인 영국에서는 최근 노동당 정부가 2004년부터 테러와 불법 이민 대책을 이유로 일반 시민들에게 의무적인 신분증(ID카드) 제도의 시행을 장기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내년부터 3년간 해마다 여권이나 운전면허증 발급을 신청하는 500만명을 대상으로 생체인식 정보를 담은 ID카드를 자동적으로 발급한다는 계획. 정부당국은 2007년과 2008년에는 460만 외국인에게 데이터베이스 등록을 의무하하며 2013년까지는 인구의 80%가 새로운 ID카드를 받도록 할 방침이다. 각종 신상정보는 전국적인 컴퓨터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하며 위조를 막기 위해첨단기술을 응용한 전자카드를 도입하겠다는 것이 정부측의 구상. ID카드에는 지문과 얼굴은 물론 홍채와 같은 생체인식 정보, 성별, 직업, 사회보장번호, 운전면허번호, 여권번호 등의 신상정보가 디지털화돼 수록된다는 것. 향후 3년간의 예상 비용은 1억8천600만 파운드. 비용이 적지 않은데다 시민의자유를 위협할 소지가 있어 진통은 계속되고 있다. 영국은 2차대전 당시 안보상 이유로 신분증 제도를 도입했다가 1952년 폐지했으나 현재 유럽내 12개국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상태다. 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와 핀란드, 프랑스, 이탈리아,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웨덴이 신분증 소지를 권장사항으로, 독일과 벨기에, 그리스, 스페인은이를 의무화하고 있다. 벨기에는 지난 1919년에 12세 이상에게 신분증을 발급, 이제는 일상화될 만큼 정착됐고 그리스도 1940년대에 신분증 제도를 도입했다. 프랑스의 경우, 19세기 말부터 일종의 ID카드가 존재했으며 현재는 인구의 51%가 이를 소지하고 있을 정도로 보편화돼 논란은 잠들어 버린 상태라고 한다. 신분증의 첨단화도 속속 추진되고 있다. 이탈리아는 내년 5월부터 실험적으로전자 ID카드를, 스페인은 내년초에 세계 최초로 `인터넷 ID카드'를 도입할 계획이다. 독일은 2006년부터 영국식 ID카드를, 벨기에는 소지자의 디지털 서명과 인증서를 수록한 칩을 내장하는 전자카드를 이미 11개 도시에서 시범적으로 발급하고 있다. 한편 EU차원에서는 오는 2005년까지 외국인에게 발급되는 비자와 체류허가증에생체인식 정보를 수록한다는 법령 초안이 이미 마련돼 있다. 또 2004년 6월1일부터는 역내 국가 전체를 대상으로 전자식 의료보험카드, 이어2005년에는 생체인식 정보를 담은 칩을 내장한 여권도 각각 도입할 방침이다. 이는 미국이 첨단 여권과 비자를 도입키로 한 데 보조를 맞춘 것으로, 장차 EU전체에서 통용되는 단일 신분증 제도의 서곡이 될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미국은 내국인에 대해 내년 10월까지 생체인식 칩이 내장된 여권을 실험하고 외국인 방문객들에 대해서는 비첨단 비자와 입국 카드를 발행할 예정. 비자 면제 협정이 체결된 EU 회원국을 포함한 29개국 국민도 내년 10월부터는기계식 판독이 가능한 여권을 제시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비자를 신청해야 한다. 미국은 9.11테러 이후 일부 아랍권및 이슬람 국가 출신의 남성들에게 미국 도착시 지문채취와 사진촬영에 응하도록 하는 절차를 채택한 바 있다. 영국 정부는 새로운 신분증이 테러와 불법 이민 방지에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신분증 제도를 이미 시행중인 유럽 국가들의 예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 인권 관련 NGO(비정부기구)들의 주장이다. 오히려 다수의 유럽 국가들에서 경찰이 소수민족에 대한 과잉단속을 펼쳐 종종물의를 빚고 있는데서 보듯, 이민 노동자의 인권 유린과 정치적 불만 세력의 제거에악용될 소지가 크다는 것이 이들의 걱정이다. 실제로 신분증이 범죄와 불법이민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는 신빙성있는 통계란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인권단체들의 주장이다. 시민의 자유를 우선의 가치로 보는 사람들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탄압이라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상기하라고 말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지난 2001년 새로운 ID카드가 도입되자 나치 점령군의 유대인탄압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안네의 일기'도 당시 독일 치하의 네덜란드에서숨어지내던 유대인 가족의 애환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독일의 한 인권 운동가는 유럽 국가들이 첨단 ID카드를 도입하려는 진정한 목적은 외국인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성벽을 높이는 데 있다면서 이것은 인종차별에 다름없다는 것이라고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제네바=연합뉴스) 문정식 특파원 jsmoo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