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명품 브랜드 시계업체에 부품을 납품하는 A사는 내년 경영계획을 짜면서 연구개발(R&D) 투자를 대폭 줄이기로 했다. 내년부터 최저임금이 시간당 7530원으로 인상되면서 한 달 인건비 부담이 3000만원 정도 커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A사 대표는 “수출 기업이 국내 사정을 이유로 단가 인상을 요구할 수 없다”며 “R&D 투자를 줄이면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최저임금 인상 등 당장 눈앞에 닥친 어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자신감 잃은 기업인들… "내년 확대 경영" 10곳 중 2곳도 안돼
경영환경 불안…현상유지가 목표

17일 한국경영자총협회가 발표한 ‘2018년 최고경영자 경제전망 조사’ 결과를 보면 최고경영자(CEO)들의 체감경기는 아직 불황 탈출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경기호황에도 불구하고 내년 경영기조를 현상유지(42.5%)와 긴축(39.5%)으로 잡고 있다는 것이 단적인 예다. 확대 경영은 18%로 10곳 중 2곳도 안됐다.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내외 기관들이 내년 3%대 경제성장을 전망하고 있는 것과는 딴판이다.

CEO의 이 같은 경영환경에 대한 불안감은 투자계획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300인 이상 대기업은 ‘올해 수준’(38.8%)으로 잡고 있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중소기업은 절반이 넘는 54.6%가 줄이겠다고 답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체감경기 격차도 컸다. 중소기업 CEO 중 45.7%는 내년 긴축경영을 계획한다고 답했고, 현 경기 상황을 ‘장기간 경기 저점이 유지되는 장기형 불황’이라고 본 비율도 51.1%에 달했다. 대기업을 포함한 전체 평균 49.1%를 웃돌았다.

‘경기 회복세가 본격화되는 시점’을 묻는 말에서도 온도차가 뚜렷했다. 300인 이상 대기업은 36.8%가 ‘2018년 하반기’를, 27.6%가 ‘2020년 이후’를 꼽았다. 반면 300인 미만 중소기업은 38.9%가 ‘2020년 이후’, 28.6%가 ‘2018년 하반기’를 지목했다. 경총 관계자는 “전체 경기가 나아지더라도 개별 중소기업은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내년 경영환경 애로요인은 응답 기업의 25.9%가 ‘소비 부진’을 꼽았다. 이어 ‘과도한 기업규제’(20.4%), ‘투자심리 위축(18.1%), ‘노사관계 불안’(14.8%) 등의 순으로 지적됐다.

최저임금 인상 때문에 고용 축소

이번 조사에서 내년 최저임금 대폭 상승을 중소기업은 ‘고용 축소’로, 대기업은 ‘무인화·자동화 등 자본투입 확대’로 대응할 것으로 분석됐다. 내년 최저임금은 올해보다 1060원(16.4%) 오른 시급 7530원으로, 인상액은 역대 최대, 인상률은 17년 만의 최고다.

300인 미만 기업 42.7%가 최저임금 인상을 ‘고용 축소(감원 및 신규 채용 축소)’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제품가격 인상이 21.4%, 자본투입 확대가 19.5% 순이었다. 반면 300인 이상 기업은 자본투입 확대가 36.8%로 가장 높았고 고용 축소가 25.7%, 제품가격 인상이 23.5%로 나타났다.

4차 산업혁명 준비 상황의 자체 평가에선 전체 응답 기업이 10점 만점에 평균 4.4점을 줬다. 세계 각국의 정부와 기업이 선도전략 마련, R&D 투자 확대 등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는 가운데 국내 기업이 현장에서 체감하는 자체 평가는 아직 미흡하다는 분석이다.

기업들은 한국이 4차 산업혁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규제혁신’(39.0%)과 ‘창조적 인재 육성’(23.2%) 정책이 시급하다고 응답했다. 이 외에도 △산학협력 R&D 확대(17.6%) △투자 관련 세제 혜택(14.0%) △실패 후 재도전 안전망 조성(6.2%) 순으로 조사됐다.

장기 생존계획 마련하지 못해

기업 과반수는 회사의 현재 주력사업이 향후 회사의 주요 수익원으로 가능한 기간은 ‘5년 미만’이라고 응답했다. 그만큼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구체적으로 △3년 이상~5년 미만이 35.6% △1~3년 21.9% △1년 미만이 4.1%로 집계돼 전체 기업의 61.6%는 5년 후를 장담할 수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기업들이 단기적인 대응에 급급해 장기 생존을 위한 신기술 개발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고 경총은 분석했다.

이 부분에서도 기업 규모에 따른 격차가 비교적 크게 나타났다. 대기업은 현재 주력사업이 ‘5년 이상’ 수익원으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응답이 52.3%로 높게 나타났지만 300인 미만 중소기업에서는 ‘5년 미만’이라는 응답이 67.9%로 높게 나타났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시행 이후 기업의 접대비 및 선물비는 법 시행 이전에 비해 23.9%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