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년 8월 30일. 54세 생일을 맞아 좁은 우리 집에 온 식구가 다 모였다.

남편이 제주도에서 모셔온 친정어머니까지 가세해 화기애애한 저녁을 보냈다.

친정 어머니는 늙은 딸의 생일이라는 것을 아는지, 정신이 흐려지기 전처럼 활짝 웃었다.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 무거웠던 마음 한편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렇게 깔끔하셨던 어머니가 온 방에 휴지를 뜯어 놓으시고, 아끼시던 책을 베란다 밖으로 던져버리는 것을 보고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돼 엉엉 울며 막막해하던 때 이후 벌써 3년이 지났다.

어머니 세대만 해도 치매환자는 가족이 나서서 돌봐야 했으므로 가족끼리 떠넘기기와 피해의식으로 형제자매간 의리가 상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제는 국립장기요양시설에서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이 하루종일 돌봐주고 각종 놀이도 하고 있다.

남편은 생일 선물로 시골에 땅 한 뼘을 장만했다며 동영상을 보여줬다.

이제 60세가 된 남편은 드디어 올해 퇴직을 하고 농사일을 배우러 다니겠다고 선언했다.

남편 덕분에 노후는 대자연에서,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텃밭 일도 하고, 재미있는 책을 읽으며 보내겠다던 내 꿈이 현실로 성큼 다가온 것같다.

요즘은 제2의 인생으로 농사일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남편은 나 몰래 별로 많지도 않은 용돈에서 저축을 해 땅을 장만했다니 더욱 사랑스럽다.

우리의 착한 딸 바다는 처음 들어간 회사생활이 즐겁기만 한가보다.

요즘은 직장마다 능력은 물론 지도력까지 갖춘 여성들이 요직에 포진해 있어 그들과의 만남이 설레며 어서 그들처럼 되고 싶다고 한다.

술을 따르라던 상사와 단란주점에 간다고 나를 따돌리던 내 첫 직장 동료들과는 천지차이다.

아이를 낳으면 육아휴직도 1년씩 할 수 있게 돼 있단다.

나는 바다를 낳았을 때 3개월 만에 복귀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던가.

오랜만에 찾아온 동생 내외도 웃음꽃이 활짝 폈다.

올해 3월 초등학교에 들어간 막내딸 달님이 때문이다.

달님이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찍어온 `고모 생일 축하해요' 동영상은 온 식구들이 오랜만에 박장대소하게 했다.

달님이의 동영상에 비친 초등학교의 모습은 옛날 오전.오후반 나뉘어 커다란 석탄난로를 가운데 뒀던 우리 시대 학교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달님이의 한 반 인원은 20명에 불과하단다.

언뜻 봤지만 아이들은 5명씩 라운드 테이블에 오순도순 앉아 3차원 모니터로 한글을 배운다.

얼마 전 일자리를 잃어 간병인으로의 재취업 훈련을 받는 올케는 자신감을 다시 회복했다.

오히려 반도체 공장에 다닐 때보다 훨씬 좋단다.

실업급여도 넉넉히 나온다고 한다.

간병인이야 요즘 워낙 찾는 사람이 많으니 내년에 훈련을 마치면 취직은 어렵지 않을 것같다.

올케가 취업을 하면 달님이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어 조금 아쉽겠지만, 달님이도 부모가 일하는 많은 다른 친구들처럼 무료로 운영되는 방과후 학교에 가서 피아노도 배우고, 영어도 배우고 싶다니 올케의 머지 않은 재취업은 올케와 달님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바다가 어렸을 때 다른 애들에게 지지않게 하려고 그리 넉넉치도 않은 형편에 과외비로 한달에 그때돈으로 수십만원을 채워넣으면서 한숨을 내쉬던 때와는 정말 다르다.

달님이는 요즘은 과외보다 방과후 학교가 깨끗하고, 선생님들도 좋아 빨리 보내달라고 칭얼대기까지 했다.

과외가 기승을 부릴 때 학원과 과외를 오가야 했던 바다는 방과후 학교제도에 대해 놀라워하고 있다.

남편이 퇴직해 연금을 받게 되면 근로장려세제(EITC) 급여와 함께 부지런히 모아 시골의 땅을 조금씩 넓혀가야 겠다.

나도 퇴직하면 정말 즐거운 노후를 보낼 수 있겠지. 하지만 같은 도서관에서 일하는 다른 아줌마들은 노조가 이번에 관철시킨 정년제 폐지에 고마워하며 죽기 하루전까지 일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남편은 시골로 내려보내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게 하고, 나는 파트타임으로 서울과 시골을 오가는 것도 괜찮을 것같다.

옛날의 그 엄청난 전셋값에 마음을 졸이며 살던 때를 생각하면 작지만 아늑한 우리 집의 임대료는 매우 적은 것이다.

덕분에 남은 돈은 조금 넉넉히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펀드에 넣어두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4년전, 운 좋게 당첨돼 이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하게 됐을 때만 해도 공공임대주택은 좁고 어두침침하다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매일매일 햇살이 비추고 창밖으로는 저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옛날에는 노후자금이네 보장형이네 라며 보험에도 엄청 돈을 쏟아부었는데 요즘은 노인들은 웬만하면 다 무료로 치료해주고, 조금 아프면 간병인을 보내주고, 혹시라도 나나 남편이 치매나 중풍에 걸려도 딸에게 부담지울 일 없이 장기요양시설에 언제나 입소할 수 있으니 마음이 놓인다.

보건소에서 무료로 건강진단을 해준다고 편지가 날아왔으니 내일은 남편과 건강진단이나 받으러 가야겠다.

(서울연합뉴스) 이 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