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스팩 몸값을 둘러싼 줄다리기
“스팩(SPAC) 기업가치는 고무줄 같아요. 매번 줄다리기가 벌어집니다. 금융당국에선 기업가치를 무조건 깎으니 일부러 높여서 신고서를 제출하죠.”

한 증권사 기업공개(IPO) 담당자는 스팩 합병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스팩은 우량 장외기업의 합법적 우회 상장을 지원하기 위해 도입된 기업인수목적회사다. 정식 IPO가 아니라 스팩 합병을 통해 주식시장에 입성하는 기업이 갈수록 늘고 있다. 하지만 스팩 합병 과정에서 장밋빛 실적 전망을 토대로 기업가치를 ‘뻥튀기’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금융감독원이 칼을 빼들었다.

금감원은 올해 초부터 본격적으로 스팩으로 상장하는 기업의 가치 평가 방식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증권사에 합병 대상의 기업가치를 낮추라는 정정보고서를 요구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올해 1분기 스팩을 통해 코스닥시장에 상장한 6개사 모두 금감원의 요구를 받아들여 기업가치를 낮췄다. 사피엔반도체는 주당 1만7865원으로 합병증권신고서를 제출했으나 결국 14% 내린 1만5330원으로 상장했다. 제이투케이바이오도 정정 요구를 받고 기업가치를 11% 깎았다. 한빛레이저와 에스피소프트 등도 기업가치를 10% 가까이 하향 조정했다.

그동안 스팩 합병기업 부풀리기는 관행처럼 이뤄졌다. 장외기업들은 자산가치와 수익가치를 토대로 주당 가격을 산정하는데 기업의 본질가치는 현재 자산가치보다 미래 수익가치에 좌우되는 경향이 있어 수익가치에 가중치를 둔다. 다만 수익 전망에 따라 수익가치가 고무줄처럼 변하기 때문에 자본시장법에선 자산가치와 수익가치 가중치를 1 대 1.5로 고정해놨다. 하지만 스팩 합병은 특례규정을 적용받는다. 수익가치 산정을 자율에 맡긴다. 성장성 높은 장외기업을 합병하기 위한 취지다. 현실에선 이를 악용하려는 사례가 빈번하게 나타났다. 정식 IPO로 상장하는 것보다 높게 평가될 수 있어 스팩 우회상장을 선호하려는 수요가 끊이지 않은 배경이다.

금감원이 칼을 빼들자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기업들이 금감원의 정정 요구에 대비해 오히려 기업가치를 더욱 높여 신고서를 제출하고 있다. 기업의 가치가 증권사와 금감원의 줄다리기 사이에서 협상 대상이 돼버린 모양새다.

다행스러운 건 스팩 주주들이 합병기업의 몸값을 스스로 판단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고평가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자 삼프로TV의 이브로드캐스팅, QED의 크리에이츠 등은 스팩 합병을 자진 철회하기도 했다. 파아이이는 스팩 주주총회에서 합병이 부결되는 사례도 나왔다. 결국엔 스팩 주주들이 판단해야 하는 문제다. 스팩 우회상장 기업의 몸값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주주들 사이에 치열하게 벌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