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문화와 예술은 지금껏 배부르고 등 따뜻해진 뒤의 일로 치부되어왔고, 국민소득이 늘고, 나라 살림이 좀 피었어도 인간에겐 여전히 지난 큰 고통보다는 지금의 작은 고통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탓에 우리는 언제나 지금이 위기가 아닌 적이 없다. 특히 경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문화와 예술은 언제나 논외이거나 먹고 살 만해진 다음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3만 불의 국민소득을 이뤄 선진국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문화예술정책은 여전히 국가가 주도하는 신생 독립국 또는 후진국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려니 좀 낮이 뜨거워져 가까스로 개발 도상국 수준이라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예술은 국가가 국민에게 베풀고 제공하고, 국가 공무원들은 국민의 문화생활을 지도 편달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해방된 지 80여 년이 흘렀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75년이 지나는데 여전히 일제강점기 일제가 식민지 백성을 다독이고자 채찍 대신 당근처럼 도입했던 문화정치의 변형된 버전일 뿐이다. 늘 반만년 역사에 빛나는 전통과 문화를 외치고, 틈만 나면 김구의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를 외치면서 정작 오늘, 우리의 문화와 예술에 대해서는 오직 계몽주의 시대의 ‘계몽’으로 일관하면서 총 13명, 20대 대통령을 맞고 있다.

계몽주의적 문화정책의 요체는 모든 국민을 한 국가의 문화적 정체성 아래 두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개인이라는 인간상을 실현하는데 두고, 시민사회 내부에서 미학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개인’을 구현하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계몽주의적 문화예술정책은 여전히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여전히 ‘민족’과 ‘제국주의’의 틀 속에 갇혀있다.

오늘날 문화 예술의 확장성과 대중성을 통해 분열된 사회체제를 통합하는 한편 국가가 그 구성원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최후, 최고의 복지로 인식되는 문화예술정책은 국가와 국가 지도자의 철학과 이념을 대변하는 하나의 중요한 정책목표가 되어야 함에도, 여전히 정책도 이념도 방향도 없는 채, 세금 나눠 주는, ‘보조사업’이란 명목의 돈 나눠주는 문화정책 아니 문화사업만 횡행한다.

정부가 공공부문에서 문화예술분야를 지원하면서 시작된 것이 ‘문화예술정책’이다. 하지만 국가와 정권마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개념이 다르고 정부의 개입과 역할의 범위도 다르기때문에 일반적으로 문화예술정책을 사전적으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문화정책을 정책과정의 측면에서 보면 ‘문화발전이라는 목표를 향하여 공권력의 배경하에 문화예술정책을 형성 내지, 결정하며 이를 능률적이고 효과적으로 집행하는 합동적 집단행위’로 문화 행정적 관점에서는 ‘문학과 예술을 포함하여 국민의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활동을 지원하고 문화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행정’으로 정의하고 있다. 또 “정부가 공공재원을 활용하여 예술을 지원하는데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문화정책의 범위에 정부가 예술활동을 지원하고 규제하는 일련의 활동 모두를 포함한다.” 이에 유럽의회(Council of Europe)는 문화정책을 문화 분야에서 ‘정부, 지방정부, 기타 공공기관 등 공공부문의 행동수단의 총체적 틀’을 의미하여, 정책목표를 달성하기위한 기획, 집행, 평가체계로 구성한다고 보았다.

문화예술정책의 목적 또는 목표

오늘날 수단과 목표가 혼동되어 쓰이는 경우가 많다. ‘소통’도 그중 하나다. 소통의 목표는 상호이해를 통해 통합과 조화로 가기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 오늘날 소통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있다. 문화예술정책도 마찬가지이다. 정책은 문화예술진흥의 목표를 정하고 걸맞는 수단을 강구 해야 한다. 그러나 해방 아니 건국 후 여전히 우리나라 문화예술정책목표는 역대 정부와 정권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적이 없다. 정권마다 문화 예술에 대한 목표가 분명치 않았으니 수단도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시류와 민심의 눈치를 보면서 시행해 왔다.

사실 문화정책은 실질적으로 국가와 정권의 지배이념을 확산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 탓에 정치경제적 환경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대개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문화예술정책은 개인의 자율성 보장이라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이념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따라서 국가는 국민의 문화향수권을 향유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을 정책목표로 삼는다. 이에 반해 사회주의 국가는 ‘사회주의 예술론’에 근거해 문화나 예술을 정치와 일체를 이루며 문예작품을 혁명의 수단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국가가 문화 활동에 직접 개입하는 것이 원칙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공식 예술론은 사회주의리얼리즘이다. 이는 엥겔스(Friedrich Engels,1820~ 1895)의 말대로 “디테일의 충실함 외에도 전형적인 상황에서의 전형적인 성격들의 충실한 재현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회주의 예술작품은 객관적 현실에 대한 충실한 묘사를 넘어 사회주의 체제가 지향하는 특정한 ‘경향성’(tendency)을 지향함으로써 본질적으로 사회주의 예술은 정치적 이념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정책의 역사를 살펴보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그것이 혼재되어 있을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 정책목표는 상실된 채 정책수단이 목표를 대신하거나 수단이 목적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우리나라 문화정책의 변이

창의 시대의 경제는 문화를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문화는 경제를 넘어 인간의 자존감과 존엄성을 그리고 삶의 질과 행복감을 높여준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인간들이 희망하는 삶의 목적이라면 결국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인 문화예술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 역대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은 목표나 목적보다는 수단에 치우친 경우가 대부분으로 특히 국가와 관료가 중심이 되어 추진했던 경제개발정책과 같은 맥락에서 관과 관료가 문화예술정책을 주도하면서 문화 예술에 관한 철학과 가치보다는 과도하게 ‘진흥’에 집중하면서 지원과 집행에 치우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광복 후 이승만 정부의 제1공화국(1948~1960)은 6.25 전쟁을 겪으면서 통일과 경제안정을 국정의 제1 가치로 삼았다. 따라서 문화 예술의 경우 신생 독립 국가로 근대국민국가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상황에서 문화 예술의 기본적인 틀과 구조를 만드는데, 그쳤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기본적인 골격은 광복과 함께 1945년 조선총독부박물관과 총독부미술관을 인수해 국립박물관과 국립미술관을 개관한 후 1952년 문화보호법의 제정을 시작으로 학술원·예술원 설립, 1953년 문화인등록령 시행, 1957년 저작권법제정 그리고 문화 시설및 기관으로 국립극장·국립극단(1950년)창립, 국립국악원(1951), 국악사양성소(1954)를 설립했다. 또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 1947)를 창립하고, 정부 주최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1948)창설과 대한민국예술원상(1955)을 제정했다. 또 문교부와 공보실에서 담당하던 문화예술분야를 1956년부터 문교부가 총괄하도록 했다.

5.16혁명으로 불과 1년도 버티지 못한 제2 공화국(1960~1961)의 문화예술정책은 경제적 빈곤과 정정 불안으로 제대로 된 정책다운 정책을 펴보지 못했다는 것이 전반적인 평가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의 제3공화국(1961~72)은 문화정책을 경제개발을 위한 국민통합의 수단으로 삼았고 혁명의 정당성을 위해 민족문화, 전통문화의 보존과 관리에 집중했다. 반공을 국시로 했던 3공화국은 승공태세를 정비하고, 사회 모순과 구악을 과감하게 제거하는 한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1963년 국사교육통일안을 마련하고 1968년에는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어 민족 주체성의 확립, 국적 있는 교육의 회복을 주창했다.
1963년 숭례문 1961년부터 2년간 해체보수한후 준공장면
1963년 숭례문 1961년부터 2년간 해체보수한후 준공장면
이 시기는 국가가 변화의 중심에 섰던 시기로 문화정책도 국가가 주도하는 통합관리 통제체제에 놓이면서 관료화한 시기다. 그런 점에서 제3 공화국의 문화예술정책은 국가가 문화를 체제 유지와 국민통합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시기이다. 정부는 이를 원만하게 수행하기 위해 문화와 공보업무를 통합, 문화공보부(1968)를 설치했다.
1968년 민족문화창달의 일환으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제작해 건립한 동상들
1968년 민족문화창달의 일환으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제작해 건립한 동상들
제4 공화국(1972~79)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선포와 함께 시작된 시대로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삼권을 장악하는 구조였다. 이 시기 정치적으로는 쇠퇴했지만, 문화예술정책은 기반을 조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문화예술정책은 3공화국 시대에 다진 경제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국민을 통합 하나의 목표 아래 일치단결하여 경제성장과 산업화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입안되고 추진되었다. 하지만 문화정책의 근간은 여전히 전통문화 계승이다. 그러나 새마을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전통문화는 보존과 계승이라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통일과 질서를 중시하는 새마을 운동의 다양한 문화적 환경변화와 국민의 새로운 삶과 생각에 따라, 기피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시기 문화예술진흥법이 제정(1972)되고, 제1차 문화예술중흥 5개년계획(1973)이 발표되고 문화예술진흥원이 설립(1973)이 되어 문예진흥기금을 모금하면서 전통보다 문화 예술과 예술가들에게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지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중흥계획의 핵심은 ‘올바른 민족사관 정립’, ‘새로운 민족예술의 창조’, ‘국민의 문화수준 향상’, ‘문화한국의 국위선양’을 정책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문화적 주체성의 확립과 전통문화예술의 계승발전이 중심을 이루었고 이는 향후 한국문화정책의 기본처럼 인식되었다. 1차에 이어 2차 문예 중흥 5개년 계획(1977)이 수립 시행되면서 세종문화회관(1978)을 시작으로 전국에 시민회관 등 공공 문화시설을 건립하는 문화정책의 기반을 다졌다. 또 박물관의 기능을 강화하는 등 민족문화복원 사업을 전개했다. 또 국내 스포츠 육성과 올림픽 유치 등 다양한 체육행사, 국제 활동을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유치하고자 노력했고 또 지원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1979)이후 최규하정부(1979~80)는 짧은 임기로 인해 특별하게 문화예술정책으로 논할 만한 것이 없다.

연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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