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싸늘한 만선열차에 올라/철도가 닿는 만주 어디쯤 머물거나 살았을/어린 송아지의 눈을 가진 사람들을 생각한다"(시 '만선열차' 중에서)

시인 곽효환(한국문학번역원장)의 문학적 고향은 '북방(北方)'이다. 십수년간 연해주·만주 등을 아우르는 북방을 연구, 창작의 공간으로 삼았다. 시집 <지도에 없는 집>(2010)부터 북방의 이름 없는 사람들을 시로 호명해왔고, 2007년 박사 논문에서는 백석, 윤동주, 이용악 등 북방 시인들을 재조명했다.
최근 다섯 번째 시집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을 출간한 곽효환 시인(한국문학번역원장). 한국문학번역원 사무실 벽에 걸린 '불우국비시야(不憂國非詩也)'는 다산 정약용이 남긴 문장으로,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다'는 뜻이다. 나라와 민초를 살피는 동양적 문학관을 보여준다는 게 곽 시인의 설명이다. 구은서 기자
최근 다섯 번째 시집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을 출간한 곽효환 시인(한국문학번역원장). 한국문학번역원 사무실 벽에 걸린 '불우국비시야(不憂國非詩也)'는 다산 정약용이 남긴 문장으로,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다'는 뜻이다. 나라와 민초를 살피는 동양적 문학관을 보여준다는 게 곽 시인의 설명이다. 구은서 기자
'북방의 시인'으로 불려온 그는 5년 만에 최근 출간한 다섯 번째 시집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에서 그 오랜 여정을 갈무리한다.

총 4부로 구성된 이번 시집의 1부에서 시인은 여전히 북방을 바라보지만, 2~4부에서는 일상의 공간에서 현실의 아이러니와 서정을 노래하며 새로운 시적 세계를 연다. 곽 시인은 "이번 시집은 그간 저를 사로잡았던 북방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시집"이라며 "어디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풍경을 쓸 때가 됐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북방의 시인' 곽효환…"이름 없이 우는 이들과 함께 울었다"
1967년 한반도의 남녘,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시인은 왜 북방에 오래도록 사로잡혔을까. 곽 시인은 "북방은 한민족의 시원(始原)의 공간이었고, 조선시대에는 청 태조의 고향으로 성역화되어 접근이 막혔던 '금단의 땅'이었으며, 근대에는 한인강제이주가 이뤄졌던 비극의 현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시인의 시선은 북방을 잃어버린 땅으로 바라보는 민족주의적 관점과는 다르다. 그는 "언젠가 상해에서 중경까지 임시정부의 자취를 따라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며 "나를 울린 건 백범 김구의 신념이 아니라 이 먼 곳까지 백범을 따라온 이름 없는 사람들"이라고 회고했다.

시집 1부에서 그는 1863년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연해주에 영구 정착한 최운보, 시베리아에서 활동했던 여성 혁명가이자 항일운동가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등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을 불러낸다.

최운보의 목소리를 빌린 시 '지신허 마을에서 최운보를 만나다'는 '갠(강)' '먹킹이(사람)' 등 함경도 방언이 생명력을 더한다.

"처음에는 전부 현대 표준어로 시를 써서 발표했어요. 시집을 내는 과정에서 함경도 방언으로 바꾸고 싶어 <겨레말큰사전> 방언 연구자에게 시를 보내 자문을 구했죠. 그런데 최운보의 말을 전부 방언으로 바꿨더니 도저히 독해가 안 돼요.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백석의 방식을 차용하는 거였어요. 백석은 시에 무수한 평안도 말을 녹였지만 체언(명사, 대명사, 수사)에만 쓰고 용언(동사, 형용사)는 안 쓰거든요."

현실에서도 시인의 눈길을 붙잡는 건 이름 없는 사람들이다. "굶주림을 피해 사선을 넘은 지 10년 만에 쌀이 남아도는 나라의 수도 변두리 아파트에서"('죽음을 건너 죽음으로') 굶어죽은 탈북민, "어느 날 화력발전소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시커먼 분진 속에 스러진 스물넷 청춘"('위로할 수 없는 슬픔')과 그 어머니….

그러면서도 그는 "오기로 했고 올 것이고 오고야 말/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미륵을 기다리며') '미륵'을 기다리는 마음, 즉 희망을 잊지 않고 적어둔다. 시인이 그려내는 희망의 풍경은 이름 없이 우는 이들의 옆자리를 누군가 지키며 함께 우는 것이다. "그냥 곁에 앉아 그와 함께 울어야 할 것 같다"('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시인은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 1부, 3부 순서를 바꾸는 등 배치를 고민했지만 맨 마지막 시는 일찌감치 정해뒀다. 시집을 닫는 '먼 풍경'은 나무 가지, 강 물길이 그렇든 "나도 내가 어떻게 뻗어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른다"고 고백한다. '북방의 시인'이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