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림·송은혜의 '오페라의 유령' K-뮤지컬은 클래스가 다르다
오페라의 유령은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는 뮤지컬이다. 시간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고, 볼 때마다 느끼는 바가 달라진다. 명품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이 명품이 한정판이다. 한국어 공연은 13년 만이다. 한국어 공연을 다시 한다해도 최소 2030년 이후에 만날 수 있을 듯 하다. 같은 캐스팅은 없다. 이번 공연은 다시 오지 않는 한정판이란 얘기다.
최재림·송은혜의 '오페라의 유령' K-뮤지컬은 클래스가 다르다

최재림이 해석한 팬텀


오페라의 유령은 19세기 프랑스 파리 오페라하우스를 배경으로 한다.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 채 숨어 사는 천재 음악가 유령(팬텀)과 그가 사랑한 극장 발레리나 크리스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유령은 크리스틴을 극장의 프리마돈나로 만들려한다. 이 과정에서 극장주 그리고 크리스틴을 사랑하는 라울 백작과 갈등을 빚는다.

지난 18일 기자는 최재림과 송은혜가 각각 팬텀과 크리스틴을 연기한 공연을 관람했다. 이날 관람한 최재림의 팬텀은 그간 팬텀과 크게 다르다고 느껴졌다. 팬텀의 등장신부터 1막 마지막까지 팬텀의 모습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 해석을 보였다. 그동안 팬텀역을 연기했던 국내외 연기자들은 1막부터 팬텀을 강하지만 내면이 약한 캐릭터로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강조할 부분은 강조하지만 힘을 빼야 할 부분은 뺀다. 팔세토(가성) 등을 통해 팬텀의 슬픈 내면을 1막부터 종종 내비친다.
최재림·송은혜의 '오페라의 유령' K-뮤지컬은 클래스가 다르다
하지만 최재림은 다르다. 1막부터 거친 팬텀을 연기한다. 다소 마초적이다. 발성이나 호흡이 거칠다. 제스처도 거침이 없다. 상대의 감정은 어떻든 자신의 감정만 중요시하는 거친 남성의 캐릭터다. '이렇게 거칠다고?'라는 생각마저 든다. 1막 마지막에 이르러 크리스틴과 라울이 부르는 '바람은 그것 뿐(All i ask of you)'에서 팬텀의 마초적 캐릭터는 정점에 달한다.

2막에 이르러서 반전이 시작된다. 극 중에선 6개월이란 시간이 지난 시점이다. 크리스틴을 자신의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팬텀은 라울과 크리스틴이 가까워지는 장면을 보면 자신의 방식을 뒤돌아본다. 그리고 질투와 슬픔에 사로잡힌다. 최재림은 그 감정변화를 발성과 호흡의 변화를 통해 표현하기 시작했다.

1막의 팬텀이 2막에서 전혀 다른 캐릭터로 변하면서 관객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한다. 점차 노래에서 팬텀의 슬픈 내면이 절제된 호흡 속에 묻어난다.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크리스틴이 팬텀의 얼굴을 맨 손으로 어루만질 때, 팬텀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 떨림 속에서 팬텀의 나약한 내면은 사랑으로 치유받는다. 그제서야 팬텀이 1막에서 그토록 거칠게 부르짖엇던 이유가 느껴진다.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 받고 싶어하는 슬픈 인간. 관객들도 팬텀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순간이다.

사실 팬텀 캐릭터는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다. 크리스틴에 대한 '가스라이팅(심리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듯 보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팬텀이 크리스틴을 자신의 지하 공간으로 데려가는 자체는 납치처럼 비칠 수도 있다. 음악적 재능을 준다는 이유로 크리스틴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는 자체도 사랑의 표현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살인까지 저지르는 그의 폭력성을 정당화하기가 어렵다. 그만큼 요즘 관객들이 팬텀에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팬텀 등장 시간은 단 25분, 사실상 노래의 감정 변화만 갖고 관객들을 설득해야 하는 만큼 팬텀 역은 여간 까다롭다.

최재림은 친절한 배우였다. 관객들이 팬텀의 감정선을 잘 따라오도록 쉽게 캐릭터를 표현해줬다. 1막에서의 팬텀은 팬텀의 심리 상태를 극대화해 표현함으로서 관객들이 팬텀에 더욱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였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최재림은 단순히 팬텀역을 연기한 게 아니라 정말 19세기 지하 세계에서 살고 있던 그 팬텀이 됐던 것이다. 2009년 재연과 내한 공연 그리고 런던 공연까지 수차례의 팬텀을 현장서 만나 본 기자로서는 겸손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었다.
최재림·송은혜의 '오페라의 유령' K-뮤지컬은 클래스가 다르다

'크리스틴' 송은혜의 발견


송은혜의 크리스틴은 2009년 재연 때 김소현이 보여줬던 크리스틴에 못지 않다고 평가할 수 있다. 더 돌아가 1986년 초연 당시 사라 브라이트만의 모습이 이랬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했다. 이번 오페라의 유령 공연은 송은혜라는 배우를 성공적으로 보여준 것만으로도 칭찬 받을 만 하다.

송은혜는 뮤지컬계 신예에 가깝다. 그는 연세대 음대 성악과를 졸업해 2018년 뮤지컬 엘리자벳에 앙상블로 출연했다. 이후 크리스틴이라는 역을 맡게된 건 파격 캐스팅이다.

그는 공연 내내 성악과 출신다운 안정적 발성을 보여줬다. 다만, 첫 노래인 '생각해줘요'에서는 계속되는 공연 탓인지 목 상태가 완벽하지 않은 듯 해보였다. 4명의 팬텀역을 2명의 크리스틴이 돌아가며 상대해야 하는데서 오는 누적 피로 같았다. 목 상태를 만회하기 위해 호흡을 평소보다 더 쓰는 모습을 몇차례 보이기도 했다. 팬텀과의 듀엣곡에서는 마초적인 팬텀 캐릭터에 너무 밀리면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부조화스럽다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2막에서는 반전이 일어났다. 크리스틴은 1막에서 겪은 사건으로 캐릭터 자체가 성숙해졌다. 1막에서의 과호흡 구간은 마치 연기였다는 듯 안정적인 발성과 호흡을 보여줬다. 특히 2막에서 송은헤가 부른 '다시 돌아와주신다면' 부분은 깜짝 놀랄 정도로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1막에서 다소 발랄하게 연기헀던 크리스틴은 2막에서 사랑을 이해하는 성숙한 여인으로 변해있었다.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느낌이었다.

그렇다. 크리스틴은 원래 이런 캐릭터였다. 그동안 다른 공연에서 봐 온, 1막부터 '완벽한' 발성을 내뿜는 크리스틴은 크리스틴의 이모나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크리스틴은 부족하지만 음악을 사랑하고, 팬텀에 대해서는 존경심과 두려움 그리고 애정이 혼재된 감정을 느끼는 캐릭터다. 그걸 송은혜는 깊이 이해하고 극 전반에 걸쳐 녹여냈다. 1막에서 부조화스러웠던 팬텀과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2막에 이르러 어우러지는 게 그 증거다. 팬텀은 순해지고 크리스틴은 깊어지며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한 길을 찾아간다.

극 중 크리스틴 나이는 발레리나라는 역할과 시대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많아야 20대 초반이다. 팬텀에게 음악 수업을 받았다 한들, 노래가 완벽하기 어려운 게 상식적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크리스틴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듯 너무 준비된, 너무 발성이나 호흡적으로 완벽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것이 크리스틴의 타고난 프리마돈나로서의 자질을 보여주기엔 충분했지만, 크리스틴 본연의 캐릭터를 살리는 덴 다소 방해가 됐었다. 송은혜는 크리스틴에 대한 그동안의 고정된 생각을 깨부수며 가장 크리스틴다운 크리스틴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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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없이 완벽했던 조연진


아무리 주연 둘이 잘 한다해도 오페라의 유령은 훌륭한 조연과 앙상블없이는 이뤄지기 어렵다. 그만큼 조연들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이날 1막 공연은 조연들이 빛냈다. 무슈 앙드레역의 윤영석과 무슈 피르맹역의 이상준은 놀라울 정도로 역할을 잘 해냈다.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으면서 각 곡의 발성과 표현이 완벽에 가까웠다.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앤드보다도 훨신 높은 수준이라고 본다.

2009년 재연 공연에서 팬텀을 연기했던 윤영석 배우는 13년만에 앙드레역으로 돌아와 경험의 힘을 보여줬다. 이상준 배우는 유쾌하면서도 안정적인 연기와 노래로 극을 이끌었다. 두 사람이 1막에서 보여준 '프리마돈나' 씬은 1막을 통틀어 가장 훌륭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뮤지컬계에서 뼈가 굵은 두 배우가 안정적으로 극을 이끌어주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더했다.
최재림·송은혜의 '오페라의 유령' K-뮤지컬은 클래스가 다르다
오페라하우스의 터줏대감 '프리마돈나'역인 칼롯타는 연기하기에 매우 까다로운 배역이다. 고음 발성이나 연기가 모두 수준급이어야 소화 가능하다. 이날 칼롯타 역을 맡은 한보라 배우는 칼롯타의 캐릭터를 익살스럽지만 사랑스럽게 풀어냈다. 표정 연기가 칼롯타가 가진 매력을 극대화하는데 일조했다. 고전적 매력의 프리마돈나 역할이었던 만큼 고음에서 비브라토(떨림음)를 좀 더 넣어서 크리스틴과의 발성적 대비를 좀 더 강조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멕 지리역을 맡은 조하린 배우는 무용 전공자 답게 발레 장면에서 아름다운 선을 보여줬다. 다만 크리스틴과의 듀엣곡인 '음악의 천사(Angel of music)' 앞 부분에서는 발성에 있어 다소 눌려있다는 느낌을 줬다.
최재림·송은혜의 '오페라의 유령' K-뮤지컬은 클래스가 다르다
이날 앙상블은 주·조연진과 전체적으로 훌륭한 조합을 보여줬다. 유일한 문제는 2막의 첫 곡이자 오페라의 유령 중 가장 화려한 장면인 가면무도회 장면에서 앙상블의 소리 크기가 다소 적다는 점이었다. 좀 더 앙상블의 소리가 앞쪽으로 나오도록 음향 세팅이 이뤄졌다면 무도회의 웅장함을 좀 더 느낄 수 있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았다.

재연, 재연바람은 그것 뿐


오페라의 유령은 뮤지컬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도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노래면 노래, 의상이면 의상, 샹들리에와 촛대, 보트 장면 등까지 무대 연출까지 빠지는 게 하나 없다. 뮤지컬의 바이블같은 셈이다. 오페라의 공연을 보고 나면 최소 며칠은 노래를 흥얼거리게 될 정도로 여운도 길다. 기자가 주변 지인들에게 오페라의 유령 공연을 '전도'하는 이유기도 하다.

특히 오페라의 유령은 조승우, 최재림, 김주택, 전동석 모두 각기 다른 매력의 팬텀을 연기한다. 크리스틴 역의 손지수와 송은혜 또한 어떤 팬텀을 만나는지에 따라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팬텀을 보기 어렵다는 게 서운할 정도다.

공연은 다음달 19일까지 이어진다. VIP석 기준 19만원의 좌석값이 다소 비싸게 느껴질 수 있다. 공연을 보고 나니 그 생각은 사라졌다. 이렇게 가버리면 또 10년 가까운 시간을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 재연, 바람은 그것 뿐.

고윤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