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시조문단을 풍성하게 이끌어준 오누이 시인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호우(李鎬雨, 1912~1970) 시인을 모른다면 학창시절 국어시간마다 딴짓을 했음에 틀림없다.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로 시작하는 시조 '개화(開花)'는 1962년 5월 문예지 <현대문학>에 발표된 작품으로, 꽃이 피는 순간을 시조로 묘사한 이호우 시인의 따스하고도 예리한 시선이 잘 나타나 있다.

또, 1955년 발행된 <이호우 시조집>에 실린 '살구꽃 핀 마을'도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뉘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처럼 정겨운 표현으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조다.

이처럼 우리 고유의 시조를 현대에 계승하여 서정의 극치를 보여준 이호우 시인의 업적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조선 중기의 황진이(黃眞伊, 1506~1567) 이래 최고의 여성 시조시인으로 불리는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 1916~1976) 시인이 그의 누이동생이라는 사실이다. 해방 이후 불모지나 다름없던 현대시조계를 이끈 남녀 주역이 오누이였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최고의 예술가로 꼽히는 허균(許筠)·허난설헌(許蘭雪軒) 남매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이호우․이영도 남매는 경상북도 청도(淸道) 출생이다. 이영도 시인은 일찍이 대구의 명문 부호 자제와 결혼했으나 남편이 슬하에 딸 하나를 남긴 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젊은 나이에 홀어머니가 되고 말았다. 1945년 8월의 일이었으며, 그때 이영도 시인의 나이 29세였다. 그러고 보면 1945년은 국가적으로나 이영도 시인 개인적으로 이러저러한 일이 많이 일어난 해인 듯하다. 1945년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대구여자보통학교 교사가 되었고, 그해 10월 통영여자중학교로 옮겨 1953년 5월까지 근무했다.

그때 시인 유치환(柳致環)이 같은 학교에 교사로 있었으며, 그의 애틋한 편지 공세가 시작될 무렵이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대구에서 발행되고 있던 시조 동인지 <죽순(竹筍)>에 시 '제야(除夜)'와 '바위'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빠 이호우 시인의 영향이 컸을 테지만, 같은 학교에 유치환 외에도 작곡가 윤이상(尹伊桑), 화가 전혁림(全爀林), 시인 김춘수(金春洙)와 김상옥(金相沃) 등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이들이 근무하고 있었던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이 시기에 폐침윤(폐질환의 일종)에 걸려 마산결핵요양원에서 휴양했고, 그동안 믿어왔던 불교에서 벗어나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후 통영중학교, 부산남성여자고등학교 등을 거쳐 부산여자대학에 출강하기도 했다. 유치환 시인 사후(死後)인 1960년대 후반에는 서울로 거처를 옮겨 글을 쓰고 대학에 출강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69년에는 유치환 서간집의 인세를 바탕으로 자신의 아호를 딴 정운문학상(丁芸文學賞)을 제정하기도 했다.

시조집으로는 1954년에 발행한 <청저집(靑苧集)>을 비롯해 오누이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중 <석류>(1968)가 있고, 유고 시조집 <언약(言約)>(1976)이 있다. 수필집으로 <춘근집(春芹集)>(1958), <비둘기내리는 뜨락>(1966), <머나먼 사념(思念)의 길목(1971) 등이 있고 유고 수필집으로 <나의 그리움은 오직 푸르고 깊은 것>(1976)이 있다.

이영도 시인의 첫 수필집 <춘근집>

1958년 11월 청구출판사(靑丘出版社)에서 발행된 <春芹集(춘근집)>은 이영도 시인의 첫 수필집이다. 시인의 나이 42세 때였다. ‘춘근’이라니? ‘봄 춘’에 ‘미나리 근’을 썼으니 ‘봄미나리’라는 뜻이다. 처음 이 책을 펼칠 때에는 매일같이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자신에게 편지를 썼던 청마의 마음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응답했으리라는 짐작에서 이영도 시인의 글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춘근집>을 들여다보는 동안 청마와의 관계 말고도 반드시 새겨보아야 할 또 다른 의미를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유치환의 <예루살렘의 닭>과 마찬가지로 가로 128mm, 세로 185mm 크기에 모두 224쪽의 본문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는 4부에 걸쳐 53편의 글이 실려 있다. 우선 표지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독특한 손글씨로 보이는 ‘春芹集’이라는 제목 아래 ‘이영도 수필집’이라는 활자가 한글로 새겨져 있고, 표지 전체 바탕에는 난초인 듯한 화려한 꽃 그림이 마치 꽃밭처럼 뒤표지까지 펼쳐져 있다. 특히 하단 3분의 1 정도를 수놓은 강렬한 색감의 그림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화풍(畫風)을 연상케 한다.
앞표지
앞표지
앞표지를 넘기면 면지가 나오고 그 뒤쪽에 예의 화풍을 담은 흑백 그림을 배경으로 이번에는 세로글씨의 제목이 새겨진 속표지가 나온다. 그 뒤쪽에 활자체로 ‘이영도 수필집’이라는 세로글씨가 새겨진 속표지가 한 장 더 나오고, 그 뒷장부터 4쪽에 걸쳐 세로쓰기 차례가 나오는데, 차례가 끝나는 지점에 두 줄의 선명한 활자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題字 金相沃’, ‘裝幀 千鏡子’. 곧 제목 글씨를 쓴 사람은 ‘김상옥’, 표지와 본문을 꾸민 사람은 ‘천경자’라는 것이다.

김상옥(金相沃, 1920~2004)은 1920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으며, 광복 이후 첫 시조집 <초적(草笛)>(1947), 동시집 <석류꽃>(1952), 시집 <의상(衣裳)>(1953), <목석의 노래>(1957) 등을 펴낸 시인이자 여러 차례 국내외에서 서화(書畫) 작품전을 개최한 서예가이면서 화가로서 명성이 높았다. 호는 초정(草汀·艸汀·草丁)이다. 특히, 그는 독특한 서체를 구사한 서예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런 김상옥 시인이 이영도 시인의 첫 번째 수필집 제목 글씨를 써준 것이다.

천경자(千鏡子, 1924~2015)는 당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서 “자전적인 주제와 화려한 채색기법으로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하였고 전통적인 한국화의 범주에서 벗어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한국민족대백과사전)는 평가를 받았던 화가이자 수필가였다. 통영 출신인 김상옥 시인과 달리 지연(地緣)과 학연(學緣) 모두 이영도 시인과 겹치지 않는 천경자 화백이 어떤 인연으로 이영도 시인의 수필집 장정을 맡았는지 알 길이 없지만, 표지화를 비롯해 본문 속 여러 쪽에 나오는 속표지에 실린 그림마다 직접 쓴 서명 ‘鏡(경)’ 자(字)가 선명하다.

본문으로 넘어가기 전에 청마 유치환 시인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다시 한 번 유심히 목차를 살피다 보니 맨 마지막 장에 시선이 머문다. 마산에서 요양하던 시절에 쓴 것으로 보이는 '요양원 일지'를 비롯하여 모두 8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끝의 두 작품이 예사롭지 않다. 한 편은 '지리산등반기(智異山登攀記)' 또 한 편은 '설악산기(雪嶽山記)'란다. 이 책이 1958년 11월에 발행됐으니 여기 실린 글들은 최소한 그 이전에 쓰였을 것이고, 또한 글을 쓰기 전에 등반했을 것이란 점에서 호기심이 가시지 않았다.

본문 내용 얘기는 뒤에서 다시 하기로 하고, 이 책의 맨 마지막에 있는 간기면을 보면 1950년대에 발행된 책마다 예외 없이 그랬던 것처럼 상단에 ‘우리의 맹세’가 실려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인지(印紙)가 붙어 있는데, 세월의 흔적 때문인지 선명하지 않아서 인장 글씨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 밑에 서지정보가 실려 있는데, 이를 통해 이 책은 단기 4291년 11월 25일 청구출판사에서 자체 인쇄소를 통해 인쇄하여 발행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책값은 ‘700환’으로 표기되어 있다. 또, 저자 이영도 시인 이외에 나오는 이름이나 지명이 없어 출판사 소재지가 어디이고 발행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청구출판사 발행으로 나와 있는 다른 문헌의 간기면을 대조해 보니 당시 ‘대구시 동성로 3가 12번지’에 지역 명문출판사로 ‘청구출판사’가 있었음이 확인되지만, 출판사 등록번호가 일치하지 않아 같은 출판사인지는 알 수 없다.

<춘근집>, 단아한 수필을 넘어 당당한 등반기까지 담은 수필집
이 책을 읽다 보니 문득 '코스모스와 더부러'라는 제목의 글에 시선이 머문다.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여성적인 정서가 담뿍 담긴 수필 속에 유난히 도드라지는 이름과 표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를 가리키는 ‘M’이라는 이니셜과 더불어 ‘누군가와 함께 살기’를 희망하는 내용이다. M은 코스모스를 좋아하는 이영도 시인에게 “가을이면 앞뒤 뜰에다 가득 코스모스를 심어 놓고 삽시다. 이것이 끝내 나의 꿈으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겠지요?”라면서 자기 희망을 토로하고 있다.

이에 이영도 시인은 “어느 조용한 바다가 내다보이는 마을, 앞뒤 뜰에 온통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아담한 집 한 채”를 상상하면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서 코스모스가 만발한 뜰에 나란히 의자를 놓고 휴식을 취하면서 시절 이야기, 고서(古書) 이야기, 자라나는 아이들 이야기를 서로 나누며 한 쌍의 나비처럼 즐거운 영혼을 안주(安住)하는 그러한 황혼을 눈앞에 그려 본다.”면서 “얼마나 미소로운 인생이겠는가?”라고 쓰면서도 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임을 자책하고 있다. 나아가 일생 동안 어떤 욕망과 이상도 이룬 적이 없는 불행한 처지임을 비관하고 있다.

이렇듯 내밀한 자기 속사정을 털어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글에서 ‘M’은 청마 유치환 시인임에 틀림없다. 독자들께서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시라고 여기 원문 그대로 글을 옮겨 본다.

코스모스와 더부러
― 코스모스 빛갈이 더욱 가냘프게도 고와 옵니다.
우리는 파인(巴人)의 해당화가 아니라 가을이면 온 앞 뒤 뜰에다 코스모스를 심거 피우다 삽시다. 이것이 끝내 나의 꿈으로만 그치는 것이 겠읍니까? ―
이것은 내가 코스모스를 좋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M에게서 온 요지음 편지의 한구절이다.
어느 잡지에선가 C여사가 쓴 글 중에서 그의 남편 파인(巴人)의 해당화 예찬의 편지를 읽고 M은 엉뚱스리 내게다 이런 시적(詩的)인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과연 나는 코스모스가 무척 좋다. 그렇기에 한 때는 동무들이 내 목이 코스모스처럼 길다고 하여 별명을 코스모스라고 붙여 준 시절도 있었다.
봄이면 목련! 가을엔 코스모스! 이 두 개의 청초하고 애절한 품격이 내게 있어 옛 시인 묵객들의 애완을 독점한 난국(蘭菊)의 운치에 못지 않는 마음 끌는 꽃들이다.
끝없이 트인 가을 하늘 아래 뜰앞에 울타리 옆에, 언덕밑 밭두던에, 소학교 화단에, 어디라 할것 없이 희고 붉게 엉클어져 화안히 눈 앞을 장식하는 그 난만한 것들을 대하면 무엔가 그립던 인정을 만난듯 내가 무슨 이것들이 피기를 오래 오래 기다리고 있었기나 한듯 마음은 감개에 젖어지는 것이다.
내 목숨도 이제 코스모스처럼 화안히 피어나 난만히 자랑을 퍼뜨릴 수 있는 계절이 닿아 올 것만 같은 공연히 마음 뻐근함을 느껴 보다가도 이내 가만히 그 하나하나의 가냘픈 꽃잎과 여윈 몸매가 창창한 추청(秋晴)을 배경하고 하늘대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으면 모두가 모두 사모치는 호소를 그 가슴 속에 담고 있는 것만 같애 그만 눈시울이 뜨끈해지는 것이다.
인정 세태가 추하고 미울수록 내게는 이 슬프도록 맑고 고운 것들이 눈물겨운 애련이 아닐 수 없다.
요즘도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기차를 타고 가다 내다 볼라치면 정거장 마다 화단을 장식한 깨끗하고도 화려한 빛갈들이 이제는 또 하나 다른 의미의 슬픈 음향을 흔들며 내 가슴에 와 닿는다.
어느 조용한 바다를 면한 마을! 앞 뒤 뜰에다 왼통 코스모스를 심어 피운 아담한 주택이 눈 앞에 그려진다.
하루의 직무에 고달픈 몸을 쉬이며 코스모스가 피어 엉클어진 뜰에 나란히 의자를 놓고 시절 이야기, 고서(古書) 이야기, 자라나는 아이들의 지혜 같은 온갖 희망스러운 이야기를 서로 나누며 한 쌍의 나비처럼 즐거운 영혼을 안주(安住)하는 그러한 황혼을 눈 앞에 그려 본다. 얼마나 미소로운 인생이겠는가?
그러나 M의 사연과 같이 이 지극히 적은 나의 소망도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 생애가 될는지도 모르는 것인가 생각하니 새삼스리 내 인생이 그지없이 덧없어지는 것이다.
인간 세상이란 인간의 진실을 끝내 허무케 하는 모순의 저자로만 내게는 보여 왔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날 나의 경륜을 스스로 믿어 보지 못하는 불행을 지닌 인간이다. 건강에, 인격에, 사랑에, 또한 조국에 인간으로서의 어느 욕망과 이상에도 나는 아직 이루어 본 기억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코스모스가 아름답게 필수록 내 꿈이 황홀해 지고 코스모스가 슬플수록 내 인생이 외로워지는 것은 나의 서정적인 생리의 소치려니와 코스모스가 가져 오는 그 아득한 또 하나의 음향만은 그대로 나의 꿈이요, 보람이요, 간절한 생명의 설계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아직도 지니고 가야 할 내 인생의 서룬 훈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책에는 이처럼 단아한 수필로만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앞서 목차의 끄트머리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제목의 내용을 본문에서 확인하고서야 이 책의 진짜 가치를 찾았다고나 할까. 여타의 수필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단아한 작품 세계를 벗어나 어쩌면 그토록 강렬한 표현으로 험산준령(險山峻嶺)을 묘사하고 있는지 놀라웠다.

아마도 '그리움'이라는 시에서 “생각을 멀리하면/잊을 수 있다는데//고된 살음에/잊었는가 하다가도//가다가/월컥/한 가슴/밀고 드는 그리움”이라고 노래했던 그 심정, 안타깝기 그지없고 애틋하기 짝이 없지만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절망 혹은 민망함이 그녀를 산으로 이끌지는 않았을까.

평소에는 쪽진 머리에 한복을 즐겨 입고 정갈하고 단아한 시조를 한평생 가꾸어 왔다는 그녀였기에 험산준령을 오르내리는 모습이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실제로 마지막 시조집 <언약>에 실려 있는 이영도 시인의 모습과 어느 등산 전문지에서 발행한 책에 실린 사진 속에 있는 지리산 천왕봉에 오른 이영도 시인의 모습은 같은 사람이라고 여기기가 쉽지 않았다.

어쨌든 이영도 시인은 1950년대에 어떤 계기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경남 산악계와 인연을 맺었고, 동네 뒷산이 아닌 지리산․설악산․한라산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을 거침없이 오르내리며 ‘등산문학’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글들을 썼다. 산에 관한 글 속에 그 산에만 있을 법한 독특한 정보가 고스란하기 때문이다. 1956년 8월에 쓴 '지리산등반기(智異山登攀記)'를 읽다 보면 마치 모험소설을 읽는 듯 재미있고, 당시 지리산 풍광을 눈앞에서 보는 듯 흥미롭다. 주요 부분을 먼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일부 표현을 현대어 표기로 고침)

등반
산록(山麓)에서 밤을 쉬고 산을 오른다.
저마다 중무장(重武裝)을 갖추고 체중보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바야흐로 거악(巨岳)을 정복한다는 자부와 용맹에서 일행은 자못 긴장한 표정들이다.
산록에서 한 시간 가량 올라가니 장엄한 계곡이 펼치는데 속진을 가실 듯한 맑은 물소리!
여기가 두류산양단수(頭流山兩端水)라 한다.
일찍 처사 조식(曺植)이 읊은 시조가 생각나 저만치 상류 어디메 복사꽃이 구름 같이 피어나는 무릉(武陵)이 보이는 듯 눈에 선해진다.
여기서부터 차츰 산길은 준엄해지고 표고 800미터 지점에 표지처럼 우뚝 선 ‘칼바위’를 지나고부터는 짙은 숲, 강파로운 낭떠러지며, 청석 위를 더듬어 기어올라야 하는 완전 정글 지대가 연속하는 것이다.
소나기가 쏟아지면 바위 밑에 피하고 부슬비는 그냥 맞으며 키보다 높이 욱은 속새밭을 헤쳐가며 골짝을 넘는 것은 오직 산을 넘어야 한다는 일념뿐 자연의 탐승이 아니라, 자연과 대결하는 하나의 인간 투쟁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세계골
여기 세계골은 이번 동란 중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수천 명의 인민군이 몰살을 당한 골짜기라 한다.
지금도 골을 타고 내려가면 해골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는 것이며 인민군의 두목이었던 이현상도 여기서 잡혔다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나이 젊은 k군이 사람의 두골을 지팡이 끝에 꿰어 들고 앞장을 서는데는 정말 가슴속까지 소름이 끼치는 것이다.
내려다보면 골은 깊어 수목은 자욱한데 솔바람소리 이따금 스쳐갈 뿐 짐승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이 등성이에 눈을 감고 서니 무수한 젊은 부르짖음이 아우성처럼 가슴에 밀고 든다.
분노에 부릅뜬 눈!
버둥거리는 팔과 다리!
얼마나 아까운 내 동족의 힘이요, 생명이요, 청춘들이었던가?
공산정치 교육에 기계처럼 굳어버린 철없는 젊은 사상(思想)들이 오직 조국을 구하는 싸움이란 그릇된 신념에서 꽃 같이 져간 목숨의 골짜기다!
이 골짝 멀리 산록에 쌍계사(雙溪寺)가 있다 한다.
조석으로 울리는 인경 소리에 못다 한 영혼들이 고이 제도 받기를 빌며 아쉬운 걸음으로 영(嶺)을 넘는다.

사냥
걷다가 날이 저물면 아무데고 식수 있는 곳이면 거기다 천막을 치기로 한다.
일행 중 수렵(狩獵)의 명수인 k씨가 멧돼지와 노루를 사냥해 와서 자못 인기 있게 갈채를 받고 모두들 산 노루 목을 따서 피를 받아 마시고는 하루의 피로가 풀렸다고 기세들을 올리는 것이다.
더러는 수풀을 베어 천막을 치고 한편에선 샘물을 치고 마른 나무둥치를 모아 불을 지피고 해서 불꽃이 등천하는 둘레에 모여 낮에 잡은 노루와 멧돼지를 구워 먹는 모양은 어느 원시의 풍속도처럼 구경답기만 하다.
까다로운 형식과 문명의 이기(利器) 속에선 문화를 고창하던 사람들도 여기선 짐승의 목을 따 생피를 마시고 멧돼지를 통째로 잡아 낚는 약육강식의 동물생태 그대로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지리산 등반에 나서는 사람들의 자못 비장한 모습과 더불어 산행 중에 겪은 일들에 대한 묘사가 매우 세밀하다. 특히,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임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 곧 여기저기 나뒹구는 두골(頭骨)을 지팡이 끝에 꽂아 들고 앞장서 가는 청년의 모습이라든가, 산 속에서 직접 사냥을 해서 잡은 노루의 피를 마시고 멧돼지를 구워 먹는 모습 등은 요즘 세상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등반 풍속도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이영도 시인은 산행기 곳곳에 시조시인으로서의 감흥을 심어 놓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다음에서 보는 것처럼 지금의 토끼봉을 가리키는 '꽃대봉', 그리고 '피아골' 등의 글 속에서 시조 작품이 그 풍미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꽃대봉
끝없이 펼쳐진 초원! 청량한 바람과 함께 풍기는 풀냄새며 나부끼는 꽃들이 어쩌면 채색 물결이 넘실거리는 바다 속에 선 것 같다.
망새꽃, 취나물꽃, 도라지, 창포, 사라리, 수국 할 것 없이 형형색색을 다투어 자랑하는 이 천오백 고지의 ‘꽃대봉’은 아무래도 천상 선녀들의 유원지였는지 모른다.
왁자히 자지러질 듯
눈부신 웃음소리
잎잎이 고운 몸짓
바람도 향그러이
풀바다 꽃이랑 위에
흰 구름이 떠간다.


피아골
적적히 말없는 골짝! 뻐꾹새 소리가 슬프게 울어 올뿐 등성이에는 고추잠자리가 축제일처럼 날라있는 지극히 평화로운 골이다. 어디메 핏자국이 있는가? 싸움에 허물어진 자취나 보이는가? 사진들을 찍고 이야기가 부산할 뿐 피아골은 듣기만하고 말이 없다.
그날 치열하던 전투를 마치고 능선을 넘어 설 때 애절한 부르짖음 같은 ‘꽃대봉’의 몸짓에 목이 멘 전우들도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한창 치욕 속에
역사도 피에 젖고

너희 젊은 목숨
낙화로 지던 그날

지친 능선 위에
하늘은 푸르른데

깊은 골 칠칠한 숲도
아무런 말이 없고

뻐꾸기 너만 우느냐
혼자 애를 타느냐?


이윽고 지리산 등반기는 '노고단'을 기점으로 끝을 맺는다. 새삼 이 글을 통해 6․25 이전에는 노고단이 서양 선교사들의 피서지로 유명한 별장지대였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양 사람들을 위한 별장과 교회와 운동장과 수영장 등등이 있었다니 요즘 시각으로도 믿기지가 않는다. 이런 흔적을 보면서 서양 사람들을 가리켜 “그네들은 정말 인생을 생활할 줄 아는 족속들”이었다고 평가하면서 “빨리 나무를 심고 길을 닦”아서 “이 좋은 산천을 우리들의 생활에 값있게 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곁들여 놓았다.

노고단(老姑壇)
육․이오 동란 전에는 서양 선교사들의 피서지로 유명했던 별장지대다. 붉은 돌집 깨어진 자취만으로도 그들의 지난날의 생활상이 보이고도 남는 것이다.
지리산 속에 가장 좋은 이 고원지대를 피서지로 택하여 별장을 짓고, 교회를 세우고, 운동장을 닦고, 뿌울을 파고, 무한한 자연 속에 현대의 문명을 가미한 시설에서 한 여름 동안을 더위를 잊고 살아간 그네들은 정말 인생을 생활할 줄 아는 족속들이었다.
지금은 나무 한그루 서 있지 않는 폐허된 등성이에 그냥 천막을 치고 피서하는 서양 사람들이 몇 세대 보일 뿐 우리가 입산한 지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세상을 본 셈이다.
빨리 나무를 심고 길을 닦고 이 좋은 산천을 우리들의 생활에 값있게 쓸 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안타까운 욕심에 잠기며 마지막 산을 내린다. (1956.8)

한편, 이 책 <춘근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설악산기(雪嶽山記'에 이르면 다시 한 번 ‘M’이 등장한다. 이영도 시인이 1958년 8월에 쓴 이 글은 ‘M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백담사에서’를 필두로 ‘오세암에서’, ‘봉정암에서’, ‘대청봉’을 거쳐 ‘울산암에서’로 글을 맺는다.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원문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일부 표현을 현대어 표기로 고침)

설악산기(雪嶽山記)
― M에게

백담사(百潭寺)에서
여기 백담사에 도착하기는 날이 꽤 저물어서입니다. 앞 계곡의 그윽한 물소리와 칠칠한 산림 속에 호젓이 에워 쌓인 이 고찰에도 주둔한 군인들의 경비가 삼엄하여 새벽 변소에도 신호를 하고 지나가야 할 만큼 불안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서울서 홍천(洪川)을 거쳐 외가평(外加平)이란 촌락까지 진종일 버스로 달려오는 동안 무려 수십 번을 겪은 지서 검문과 용문산 부근을 지나면서부터는 연도 산록을 잇닿은 병막(兵幕)들이며 아직도 군데군데 잡초 속에 그냥 버려져 뒹구는 전차(戰車)의 잔해는 여기가 바로 휴전선의 최전방임을 새삼 깨닫게 하여 스스로 세태의 긴박감에 마음 굳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관대리에서 인재 남면 일대에 뻗친 우리 3군단의 서슬도 장엄한 위풍은 가도 가도 수수 강냉이밭의 푸른 들녘과 소양강 지류의 구비 도는 물빛 수려히 뻗어선 태백의 연만(連情)들! 그 기슭에 띄엄띄엄 숨어 앉은 백성들의 토막들이 너무도 대조되어 실로 감개가 무량했던 것입니다.

이제 계절은 얼마 아니하여 이 지대에 겨울이 오면 백설에 쌓인 병막 속에 애절할 수가 마음에 미리 느껴져 인정의 아쉬움과 함께 총대를 메고 선 파수병의 앳된 얼굴이 내 동생처럼 귀엽기만 했습니다.

하루 빨리 평화한 세월이 오고 삼팔선이 열려서 이 아름다운 지역에 도시가 이루어지고 지금 지서가 지켜선 자리엔 우체국 도서관 같은 문화기관이 대치되는 날에야 우리의 생활도 즐거울 것이지만 산위엔 구름만 허허히 떠돌 뿐입니다.
이 백담사도 병화를 입어 수리 중에 있으므로 난장판 같이 어수선하나 오직 둘레를 에워 있는 100개가 연달았다는 천연의 담계(潭溪)에서 풍겨오는 물소리에 모든 것이 정화되는 밤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중간 생략]

울산암(蔚山巖)에서
봉정암을 떠난 우리들은 절벽을 넘어 계곡을 타고 오세암에 다시와 막영을 하고 다음날 마등령을 넘어 밤 늦게야 외설악 신흥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절문 앞에는 술, 과자 등속을 파는 매점이 있고 유흥객을 실은 지프차, 트럭, 버스 소리의 연락부절한 금속음향이 7~8일 동안을 산속에서 곱게 쉬던 청신경(聽神經)을 여간 따갑게 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나는 아무래도 현대문명의 소용돌이 속에는 배겨낼 수 없는 체질을 가졌는가 보군요?
이 신흥사도 전화를 입어 절간의 청정한 분위기는 찾아볼 길 없으나 건물은 거의 남아 있어 우리 일행은 다락을 빌려 들어 입산한 지 처음으로 천막 아닌, 마루바닥이나마 지붕 밑에서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절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계곡을 면하여 우뚝 산처럼 솟은 울산암! 이것은 바위 한 개가 바로 한 개의 산입니다.
만산 청록 속에 홀로 올올이 낙조에 타는 이 남의 산 모양! 벗기어 깡그리 벗기인 채 청천백일 앞에 자기를 내놓고 한 방울 물, 한 포기의 풀잎도 거부하는 이 준렬한 자기 다스림을 바라볼 때 진실로 내 인간의 하잘 것 없는 외면치레가 견딜 수 없이 부끄럽고 송구한 것입니다。
어느 날 그 준열한 심판의 빛 앞에 나(裸)히 벗고 설 자신이 바라보이는 것입니다. 자연 앞에 서면 어느 하나 내 인생의 지표 아닌 것이 없고, 질책 아닌 것이 없고, 사랑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 인간에서 꾸겨지고 때 묻은 심신을 여기에 곱게 씻고 맑은 마음, 맑은 정신、맑은 생각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내일은 속초(束草)로 나가서 낙산사(洛山寺)에서 막영을 하고 모래는 강릉으로 나가 신사임당(申思任堂)이 율곡 선생을 낳아 기르셨다는 오죽헌(烏竹軒)을 거쳐 경포대에서 쉬고, 다음날 대관령을 넘어 서울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올 때는 한강 상류와 소양강 지류의 맑은 물줄기를 따라 내설악을 접어 들어, 갈 때는 동해의 푸른 바다를 끼고 버스로 달릴 것을 생각하니 마음 절로 부푸는 것입니다. (1958. 8)

이영도 시인의 언약(言約)은 천상에서도 지켜지고 있을까?
이영도 시인의 마지막 시조집 <言約(언약)>에 얽힌 이야기는 매우 서글프다. 1976년 10월 15일 중앙출판공사에서 발행된 이 시조집은 다음과 같은 표제작인 '언약'을 서시(序詩)로 삼아 7부에 걸쳐 48편의 시조작품으로 꾸며졌다.

해거름 등성이에 서면
愛慕(애모)는 낙락히 나부끼고

透明(투명)을 切(절)한 水天(수천)을
한 點(점) 밝혀 든 言約(언약)

그 자락
감감한 山河(산하)여
귀뚜리 叡智(예지)를 간(磨)다


그런데 이 시조집은 졸지에 유고(遺稿)가 되고 만다. 이 시조집을 펼치면 속표지에 이어 생전에 생가(生家)인 듯 초가집과 감나무가 보이는 돌담 곁에서 찍은 시인의 미소가 번지는 흑백사진이 있고, 그 뒤를 서문인 듯 ‘책 머리에’라는 글이 나온다. 이 글은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1903~1982)이 1976년 8월에 썼는데, 그 내용이 자못 짠하다.

서두를 “이영도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다정다감한 여인이었다.”로 시작하는 대목에서 이미 시인의 부재(不在)가 짐작이 가지만, 기실 이 시집은 이영도 시인이 살아 있을 때 완성하여 직접 원고를 들고 찾아가 노산 선생에게 서문을 부탁한 것이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면 그때 그 장면이 선연하게 떠오르는 듯하다.
언약 앞표지
언약 앞표지
그가 마지막 세상을 떠나던 바로 전날인 3월 5일, 그는 나를 찾아와 함께 점심을 나누며, 그날도 역시 시를 이야기했었다.
물론 그와 나는, 몇 시간 뒤, 바로 그날 밤으로 그의 생명이 끝날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죽음의 신은 아마 그와 내게 서로 작별하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던 것인가 보다.
그날, 그는 내게 자기가 손수 쓴 시조집 원고 뭉치를 맡기며, 서문을 붙여 달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나는 물론 쾌히 그것을 승낙했었다.
그리고 서로 헤어진 채 그는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갔고,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이제 나는 그와의 생전의 약속을 지켜, 그가 끼치고 간 마지막 시조집에 서문을 쓰기 위해 이 붓을 들었다.

그러니까 60세가 되던 해인 1976년 3월 5일에 이영도 시인은 그동안 써서 모은 시조 원고뭉치를 들고 당대 최고의 시조시인이자 선배였던 노산 선생을 찾아가 친히 서문을 부탁했던 것이다. 아울러 점심식사까지 함께 나누고 돌아갔는데, 그날 밤(정확히는 1976년 3월 6일 0시가 막 지난 시간) 이영도 시인은 갑작스런 뇌일혈(腦溢血)로 인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처럼 허망하게 세상을 등진 이영도 시인의 장례식은 그해 3월 8일 문인장으로 치러졌으며, 당시 장례위원장 또한 노산 이은상 시인이었다. 유언에 따라 시신을 화장했으나 차마 뿌리지 못하여 시인의 고향인 청도읍 어목산(魚目山)에 안장했다고 한다.

이제 시인은 이 세상에 없지만, 이영도․이호우 남매가 태어난 고향 경북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에는 그들의 생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여전히 시인 남매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단다. 2006년 12월 4일에는 등록 문화재 제249호로 지정되어 청도군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2005년 1월에는 오누이 시조시인의 생가 인근에 그들을 기리기 위한 ‘오누이 시비(詩碑) 공원’이 들어섰다.

여기에는 높이 3m, 폭 5.5m, 두께 80㎝의 ‘이호우 시비’와 높이 3m, 폭 4m, 두께 80㎝의 ‘이영도 시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청도군에서는 2009년부터 매년 11월 ‘이호우·이영도 오누이 시조 문학제’를 열어 오누이의 시정신을 계승할 신인을 발굴하고 있다.

이영도 시인의 마지막 시조집 <언약> 서문에 있는 노산 선생의 애절한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나저나 이영도 시인은 천상에서 청마를 다시 만났을까. 그리하여 코스모스 만발한 뜰이 있는 집에서 오순도순 살고 싶었던 꿈을 이루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꿈을 찾아 천상의 험산준령을 오르내리고 있을까. 명복을 빈다.
이영도시인
이영도시인
시인이 자연을 묘사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시인이 어느 깊은 경지에 들어갔다고는 보기 어렵다.

시는 어떤 묘사로써 일삼기보다는, 자연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음악이나 미술 등 모든 예술에 다 통하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이영도의 시조 작품 속에서 그가 자연과 나누던 대화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느 것에서는 그가 자기 스스로 맑고 미묘한 정서 속에 휘말려 들어가서 숨 가쁘게 심호흡하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무엇인가 갈구하고 있었다. 신의 문을 두들기며 대답을 들으려 했다. 그러나 마침내 세상 인연을 끊어버리고 신의 품속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것이 그의 일생이었다.

다만 사향(麝香) 노루가 지나간 뒤에는 발자국 닿은 풀끝마다 향기가 끼치듯이, 그는 어디론지 가버렸건만, 향내 머금은 작품들이 남아 우리 가슴에 풍기고 있다.

길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