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서부이촌동에 '국평이 11억'? 중산시범 아파트의 비밀
중산시범은 다른 아파트랑은 좀 다른 거 아시죠. 건물값만 10억이에요. 곧 토지매입가가 나온다고 하는데, 아는 사람만 알고 뜸하게 연락이 오네요.(용산구 서부이촌동 한 공인중개사)

서울 강변북로를 타고 서쪽으로 가면서 한강철교를 지나면 붉은 벽돌로 지어진 7층짜리 아파트가 보인다. 곳곳에 페인트칠은 벗겨지고 건물을 지탱하는 시멘트 기둥에는 금이 가 있다. 지어진 지 올해로 53년째가 된 서울 용산구 서부이촌동의 중산1차시범 아파트다. 최초의 고급(맨션) 아파트라는 동부이촌동 한강맨션보다 3개월, 서울시가 심혈을 기울여 직접 지은 여의도 시범아파트보다 한 살 많다.
서울 용산구 서부이촌동 중산시범아파트. 주차공간이 별도로 없다. 1층은 상가공간으로 지어졌다. 벽에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군데군데 금이 가있다.  / 박진우 기자
서울 용산구 서부이촌동 중산시범아파트. 주차공간이 별도로 없다. 1층은 상가공간으로 지어졌다. 벽에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군데군데 금이 가있다. / 박진우 기자
원래 판자촌이나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이촌 시민아파트였다가 마포구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를 계기로 보강공사가 들어가면서 '시범'이란 단어가 붙었다. '중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 말 그대로 중산층을 타깃으로 한 아파트였기 때문이다. 분양 당시 명칭도 '중산층아파트'였다. 서울시 관계자는 "한국형 고층 아파트의 시범모델로 건축된 아파트"라고 설명했다.

'날림 행정' 탓...토지소유권 없는 아파트가 되다

중산1차시범 아파트는 1969년 10월 입주자를 모집했다. 그러다 이듬해 4월 마포구 와우 시민아파트가 무너지면서 김현옥 서울시장이 사임하고 관련 담당자가 대거 물갈이됐다. 문제는 입주민의 토지소유권을 정리한 서류가 없어졌다는 것. 토지소유권 문제를 정리할 새도 없이 '지적(地籍) 미확정'을 이유로 1970년 6월말 건축물만 분양해 바로 두달여 만에 준공했다. 이 때문에 분양계약서에 '소유권자의 매수 요구가 있을 대 공동지분으로 지체없이 매수'하도록 할 것을 조항으로 넣어뒀다.
용산 서부이촌동에 '국평이 11억'? 중산시범 아파트의 비밀
어찌나 서둘렀던지 '날림'으로 지어졌다는 신문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1970년 9월3일자 경향신문 <중산층아파트공사 소홀>이라는 기사에는 9월15일 준공 예정인 중산1차시범의 골조공사가 날림인 데다 기둥이 너무 가늘어 위험하다며, 이를 보수하지 않으면 잔금을 내지 않겠다는 입주민의 항의 내용이 나온다. 당시 기사에서도 주민은 "대지값을 입주 전에 확정해 계약을 맺지 않고 질질 끄는 건 땅값을 올려받으려는 속셈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입주자와 건물계약만 했으니 땅값은 따로 감정평가가 끝나는대로 공동지분으로 계약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적혀있다. 1972년에 주민들은 토지가를 산정해달라고 다시 요구했지만 산정자료가 미비하다는 이유로 1976년 건물소유권만 이전됐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게 최초의 '토지임대부 분양주택'이 됐다.
용산 서부이촌동에 '국평이 11억'? 중산시범 아파트의 비밀
53년이 지나도록 토지소유권은 주민에게 이전되지 않았다. 주민은 재건축이 시급한 탓에 토지매입에 방을 동동 구르고 있다. 중산1차시범은 재건축 연한이 차기 전인 1996년에 이미 특정관리대상시설 안전등급에서 D등급으로 지정됐다. D등급은 '긴급보수가 필요'하며 '사용제한에 대한 결정이 필요'한 시설이다.

주민은 서울시 땅을 사겠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2004년 토지의 점유·취득시효가 완료됐다며 서울시에 무상 양도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12년을 끌다가 2016년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했다. 재건축이 이렇게 지연된 동안 서부이촌동은 더 낙후됐다. 중산1차시범은 노후도가 95%를 돌파했다. 반경 700m 이내에 초등학교가 없고, 대형마트도 없다. 배정 가능한 초등학교는 직선거리로 1.3㎞ 떨어진 남정초다. 그마저도 중간에는 휑하니 용산정비창 부지가 있어 돌아가야 한다. 중·고교 배정학교인 용강중은 2.2㎞, 중경고는 2.4㎞ 거리다. 심지어는 그 흔한 식당이나 동네병원이 없을 정도로 외진 동네가 됐다.

용산국제업무지구, 이번에는 간다

그렇게 답답한 동네에도 날아든 희망이 있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2007년 7월 한강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발표하면서 용산 정비창과 서부이촌동을 통합 개발하겠다고 밝힌 것. 오늘날의 '용산 국제업무지구' 개발 사업은 당시 급물살을 탔다. 바로 다음달에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에서 서부이촌동 통합개발안이 통과했고 그해 연말 드림허브프로젝트투자회사라는 이름으로 시행사까지 설립됐다. '트리플 원'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의 롯데월드타워보다 높은 620m 랜드마크도 계획됐다.

서부이촌동은 당시 온 동네가 들썩였다. 서부이촌동 대림아파트의 전용 59㎡ 시세는 2007년 7월5일 4억8000만원에서 6일 6억원, 7일 7억원으로 매일 1억원씩 올랐다. 11월에는 8억7000만원에 계약되며 8억~9억 수준이던 동부이촌동을 역전했다는 말도 나왔다. 서울시 공시지가 상위 50위 필지 가운데 47개 필지가 서부이촌동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 시장이 교체된 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으로 건설사들이 사업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은 끝에 2013년 시행사가 부도하면서 용산정비창 사업은 무산됐다.
용산 서부이촌동에 '국평이 11억'? 중산시범 아파트의 비밀
오 시장이 돌아온 후 용산국제업무지구 사업은 다시 속도를 내고 있다. 작년 7월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구상안이 발표되면서다. 서부이촌동을 구역에서 제외하고 법적 상한용적률 1500~1700%를 허용하는 내용이 골자다. 과거 장애물로 지적된 민간 주도 프로젝트금융회사(PFV) 방식 대신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와 코레일이 공동사업시행자(코레일 70%, SH공사 30%)로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통개발'이 아니라 여러 획지별로 나눠서 단계별·순차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업무시설과 호텔, MICE(마이스) 시설 등 업무·주거·사업 등 여러 기능이 한 구역에 들어갈 수 있는 복합개발이 허용된다. 주거 연면적 비율은 30%로, 6000가구가 들어설 전망이다. 지상은 대형 공원과 녹지축이, 지하는 강변북로·한강대로·청파로 등 간선도로를 연결하는 대규모 지하도로가 놓인다. 총 사업비는 30조원을 웃돌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서울시는 2027년까지 도로 등 도시기반시설을 설치하겠다는 목표를 잡아놨다.
용산 서부이촌동에 '국평이 11억'? 중산시범 아파트의 비밀
다만 실거주 의무가 있는 토지거래허가구역인 탓에 서부이촌동 아파트의 거래량은 많지 않다. 대림 59㎡은 2021년 7월(18억원) 이후로 거래가 없다. 96㎡은 작년 8월 용산 국제업무지구 발표 소식에 21억원 최고가를 기록했다가 지난 3월 17억원에 손바뀜했다.

토지매입가, 이르면 올 연말에 결정난다

중산1차시범은 여전히 토지매입이란 숙제를 남겨두고 있다. 주민 동의율 100%를 채워야 이 단지 전체 부지의 통매입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최근에서야 동의율이 90%를 웃돈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주민이 2021년 해결책을 냈다. 모든 땅을 한 번에 사는 게 아니라 동별로 사자는 것. 통매입 방식보다 매입에 필요한 동의율 요건(주민의 75%)도 낮다. 서울시도 한 번에 땅을 매각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지이지만, 재건축의 시급함을 고려해 동별 매각방식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서울시는 1996년 서울시의회에서 5년간의 토지 임대료를 납부하는 조건으로 토지매각에 동의한 것을 참고해 작년 공유심의위원회에서 이같은 매각방식을 결정했다. 주민들도 동별로 차이가 있지만, 2000만원가량의 대부료 납부를 대부분 완료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부료 납부가 완료되면 서울시와 용산구는 감정평가를 거쳐 토지매입가를 결정하는 가격사정심의위원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연초만 해도 연말께 심의위를 진행해 내년 6월말까지 소유권을 이전한다는 계획이었지만, 대부료 납부가 완료되지 않아 일정이 늦어지고 있다. 토지매입가가 결정되면 실질적으로 이 아파트의 시세가 얼마인지 결정이 난다.
용산구 서부이촌동 중산시범아파트. 단지 공중으로 전선이 노출돼있다. / 박진우 기자
용산구 서부이촌동 중산시범아파트. 단지 공중으로 전선이 노출돼있다. / 박진우 기자
이 땅의 공시지가는 1㎡당 995만원이다. 감정평가업계에서는 통상 공시지가의 2.5배 정도를 감정평가가로 분석한다. 한 때 3.3㎡당 토지매입가가 8000만원에 달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 이유다. 이 숫자대로면 전용 59㎡ 소유자는 집을 매수할 때 들인 11억원에 토지매입가까지 더해 총 20억원이 넘는 금액을 들여야 재건축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최초의 토지임대부 분양주택이라는 점을 고려해야한다는 지적도 있다. 때문에 주민은 토지매입가가 3.3㎡당 3000만~5000만원 선에서 결정될 것으로 예상한다. 현재 매매가 11억원에 토지매입가를 더하면 전용 59㎡ 타입이 15억~16억원대가 될 전망이다. 법정 상한용적률이 300%인 제3종 일반주거지역이지만, 현재 용적률이 228%로 높은 편이어서 상당한 재건축 분담금을 부담해야할 것이란 전망이 많다.

박진우 기자 jw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