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크레디트스위스(CS)의 굴욕
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빈사(瀕死)의 사자상’은 1792년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그해 8월 10일 10만여 명의 파리 시민이 루이 16세 일가가 머무는 튀일리궁으로 몰려갔다. 근위대까지 다 도망갔지만 스위스 용병 786명은 끝까지 궁을 지키다 전원 전사했다. 루이 16세가 “임무를 다했으니 가도 좋다”고 했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죽은 병사의 품에서 ‘우리가 신용을 잃으면 후손들이 용병이 될 수 없다’는 편지가 나왔다.

스위스는 국토의 70%가 산지다. 먹고 살 만한 게 변변찮다. 스위스인들은 생계를 위해 용병으로 싸웠다. 이들을 ‘라이슬로이퍼(Reisläufer·전장으로 나가는 사람들)라고 불렀다. 이 스위스 용병들은 용맹과 충성으로 명성을 떨쳤다. 한 번 맺은 계약은 죽어도 지킨다는 게 이들의 철칙이었다.

이런 신뢰를 기반으로 꽃피운 게 금융산업이다. 전 세계 부호는 물론 히틀러나 김정은 같은 독재자까지 스위스 은행에 돈을 맡긴다. 소유자 실명 없이 익명의 숫자 하나로 계좌를 개설할 수 있다. 그래도 세계 최고의 안전을 보장받는다. 이런 스위스 금융계를 대표하는 은행 중 하나가 크레디트스위스(CS)다. 167년 역사를 가진 이 은행은 UBS와 함께 스위스 금융산업의 자존심으로 불린다.

그런 CS가 벼랑 끝에 몰렸다. 신뢰의 위기다. 지난해 10월 처음 유동성 위기설이 나온 후 3개월간 전체 수신액의 20%가 빠져나갔다. 그제는 가장 오랜 투자자 중 한 명이 지분 10%를 매각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주가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2년간 순손실은 30조원, 주가 하락폭은 77%에 달한다. 올해도 추가 손실이 있을 수 있다는 예고다.

위기의 원인은 욕심이다. 최근 영국 그린실캐피털과 한국계 투자자 빌 황의 아케고스캐피털에 투자했다가 엄청난 손실을 냈다. 모두 투자 수익을 부풀리고, 리스크는 숨기다가 난 탈이다. CS는 투자은행을 분리하고, 인원을 감축하는 등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한 번 잃은 신뢰를 다시 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10년 가까운 초저금리 파티의 끝은 처참하다. CS 사태도 근본적으로 그런 난장판의 일면일 뿐이다.

박수진 논설위원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