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다시 읽는 기미독립선언서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의 이 구절 때문에 야권으로부터 맹폭당하고 있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일제의 강점과 지배를 합리화하는 식민사관”이라며 “매국노 이완용의 말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비난했다. 김동연 경기지사도 “일제의 국권 침탈을 정당화하는 것이냐”며 “기미독립선언서를 제대로 읽어보기를 권한다”고 거들었다. “친일본색” “3·1정신 훼손” 등의 비난도 이어졌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제의 불법적 침략 사실을 적시하지 않았다고 해서 매국노 이완용과 비교하는 게 온당할까. 구한말 열강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우리의 불비(不備)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메시지를 ‘국권침탈 정당화’로 해석하는 독법이 놀랍고도 당혹스럽다. 기미독립선언서를 다시 읽어보자. 민족대표 33인은 일본을 단죄하거나, 그들의 의리 없음을 꾸짖으려고 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하고 탓할 겨를이 없다. 현 상황을 수습하기에도 급해서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 여유도 없다. 우리가 할 일은 자기의 건설이 있을 뿐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양심의 명령으로 우리의 운명을 개척하는 것이지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 남을 시기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다.’

윤 대통령이 “일본이 과거 침략자에서 ‘협력 파트너’가 됐다”고 한 데 대해서도 박 원내대표는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를 모른 척한다”며 “대일본 굴종외교만 재확인한 셈”이라고 주장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진정한 이해와 동정에 기본한 우호적 국면을 새로 여는 것이 서로 간에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부르는 첩경”이라고 했다. 행동강령인 ‘공약 삼장’ 첫 번째가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정도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21년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을 ‘매우 중요한 이웃’이라고 규정하고 “과거에 발목 잡혀 있을 수는 없다”고 했고, 지난해 3·1절에는 “한·일 양국의 협력은 미래세대를 위한 현세대의 책무”라고 강조했다. 그때와 지금은 뭐가 다른가.

서화동 논설위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