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오늘] 31년 맞은 남북기본합의서…큰 의미에도 실행은 정체
남북관계의 이정표 격인 '남북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된 지 31년이 지났다.

1991년 12월 13일 오전 9시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제5차 고위급 회담에서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남북 양측은 당장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공동 인식 아래 상호 인정, 군사적 불가침, 교류·협력을 통한 점진적 통일을 천명했다.

1992년 2월 18∼21일 평양에서 열린 제6차 고위급 회담에서 당시 남측 수석대표였던 정원식 국무총리와 북측 대표단장이었던 연형묵 정무원 총리가 각각 내부적인 발효 절차를 거쳐 교환함으로써 발효됐다.

남북이 상호불신이 아닌 서로를 인정하는 관계를 설정하는 등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 협력을 위한 기본을 담음으로써 이후 발표된 남북 합의의 준거 틀이 됐으며 통상적으로 기본합의서로 불린다.

1972년 조국통일 3대 원칙(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천명한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19년 만에 남과 북이 이룬 합의로 평가된다.

기본합의서는 전문 외에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제1조)로 시작되는 1장(남북 화해)을 비롯해 남북 불가침(2장), 남북 교류·협력(3장), 수정 및 발효(4장) 등 4개 장과 25개 조항으로 구성됐다.

남북은 전문과 6개 조문으로 구성된 '비핵화공동선언'도 6차 회담에서 2월 19일자로 발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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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기본합의서의 1∼3장의 이행 대책을 협의한 각 분과위원회는 협의 결과를 화해, 불가침, 교류·협력 3개 부속합의서로 채택했다.

부속합의서는 1992년 9월 17일 발효됐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당대 대표적 간첩단 사건인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이 터진 데 이어 북한이 팀스피릿 훈련 재개를 핑계로 분야별 남북공동위원회에 불참하고 9차 고위급회담을 무산시키는 등 남북 관계가 급격히 악화했다.

결국 1993년 초 1차 북핵 위기가 터지면서 남북기본합의서와 3개 부속합의서는 이행이 이뤄지지 못했고 남북고위급회담 체제도 허물어졌다.

다만 문재인 정부의 '9·19군사합의'에 불가침에 관한 부속 합의가 구체화하는 등 30여 년간 남북 관계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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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기본합의서 실천이 무위가 된 책임을 미국에 떠넘기면서도 여전히 합의서 기본정신을 중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노동신문은 2019년 1월 논평에서 "1990년대 초 북남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협력, 교류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자 북핵위기를 조성해 휴지장으로 만들어버린 당사자가 바로 미국"이라며 "미국은 대조선 제재와 압박의 시각에서 북남관계를 고찰하는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족화해협의회 선전매체 '려명'은 지난 8월 "김일성 주석이 "민족의 대단결을 도모하는 것은 북남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의 기본정신"이라며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민족공동의 이익을 첫 자리에 놓고 거기에 모든 것을 복종시켜야 하며 조국애와 민족자주 정신에 기초해 단결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셨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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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