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K테크'라는 환상
미국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 최근 만난 농업 분야 스타트업 대표는 흥미로운 분석을 내놨다. “잡종강세(잡종이 순혈보다 강한 생활력을 갖는 현상)의 원리를 가장 잘 구현한 곳이 미국”이라는 것이다. 식물이나 가축에 적용되는 이론이긴 하지만, 전 세계 다양한 사람이 모여드는 미국이야말로 ‘잡종강세의 표본’ 아니겠냐는 얘기다.

세계 무대를 호령하는 빅테크 수장의 면면은 ‘용광로 미국’의 실체를 증명한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창업자는 남아공 출신이다. 실리콘밸리의 내로라하는 기업 최고경영자(CEO) 중엔 인도계가 수두룩하다.

미국은 고립주의를 탈피하면서 세계 ‘원톱’의 지위를 굳건히 할 수 있었다. 인재를 끊임없이 받아들였다. 그 덕분에 미국의 시야는 늘 ‘글로벌’로 향했다.

세계를 위해 질문하는 미국

모더나 연구원들은 ‘질병 정복’이란 원대한 꿈을 우공이산의 방식으로 실천해 왔다. 그들의 발상 전환 덕분에 우리는 코로나19의 공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고 있다.

미국의 시야는 심지어 탈(脫)지구적이기까지 하다. 1998년에 나온 영화 아마겟돈을 떠올려보라. 브루스 윌리스가 열연한 평범(?)한 우주인 가장은 영웅적 희생으로 지구를 구했다. 소행성에 핵무기급 폭약을 설치해 터트린다는 발상은 실제로 미 항공우주국(NASA)이 오래전부터 연구개발(R&D)해온 주제다.

미국의 강점은 거꾸로 유럽 제국의 쇠락 원인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합스부르크의 턱’은 이와 관련한 대표적 상징이다.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한 합스부르크 왕가는 순혈을 지키기 위해 오랜 세월 근친혼을 유지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꿈꿨던 카를 5세는 ‘고귀한 피’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는 비정상적인 긴 턱으로 섭생에 어려움을 겪었다. 제국을 만드는 데 실패하고 말년을 쓸쓸하게 수도원에서 보냈다.

테크 자립은 '국뽕'일 뿐

요즘 국내에서 ‘K테크’라는 말이 나오는 모양이다. 한국형 인공지능(AI), 한국형 양자컴퓨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부, 외교부 등 부처마다 기술 주권을 지키기 위해 어떤 기술을 육성해야할지 리스트를 작성 중이다. 남들 하는 것을 다 좇아가면서, 동시에 기술 자립도 달성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목표다.

전문가들은 “K테크는 실현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양자컴퓨터만 해도 미국에 5년 이상 뒤처져 있다. K양자컴퓨터는 언감생심이다. 주한별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AI는 소스 코드를 공개하는 것이 글로벌 룰”이라며 “한국형이라는 말을 붙이는 순간 오히려 왕따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런 딜레마를 극복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선택과 집중이다. 1등이 되기 힘들다면, 언제든 기술을 빌려올 수 있는 ‘동맹’을 만들면 된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세계를 리드할 ‘최초의 질문’을 할 수 있느냐다. 남들이 출제한 문제만 열심히 풀 게 아니라 한국이 문제 출제자의 지위에 올라서려 애써야 한다는 얘기다.

K테크가 아니라 글로벌 테크를 지향해야 그나마 해답이 나올 것이다. 혹시라도 정책 결정자들이 ‘테크도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면,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