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어느 KTX 열차 개발자의 편지
“KTX-산천 고속철도 개발 당시 새벽마다 시운전 차량 바닥에서 쪽잠을 자던 게 생각납니다. 애써 국산화한 기술의 가치가 벌써 잊힌 것 같아 씁쓸하네요.”

지난 10일 ‘KTX 국산화 26년 걸렸는데…외국 업체에 국내 고속철 시장 내줄 위기’라는 제목의 한국경제신문 보도(10월 11일자 A12면)가 나가자 국산 고속철 개발에 기술진으로 참여한 A씨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가 발주할 차세대 고속열차 프로젝트에 스페인 탈고(TALGO), 일본 도시바, 국내 중견기업(우진산전) 컨소시엄이 참여할 예정인데, 저렴한 가격을 앞세워 국내 업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게 보도의 골자였다.

A씨가 기술진으로 참여했을 때는 현대로템이 프랑스 알스톰의 TGV(테제베)를 물리치고 KTX-산천 양산차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다. 기술 이전 상대인 알스톰을 이긴 만큼 무에서 유를 창조할 정도의 ‘홀로서기’가 불가피했다. 당시 그가 맡고 있던 시험 차량 시운전을 위해선 영업 운행 시간을 피해 새벽에 작업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여름에는 에어컨도 없는 열차칸에서 모기와 사투를 벌이고, 겨울에는 반대로 싸늘한 냉기가 감도는 바닥과 싸웠다.

A씨 외에 많은 인력이 ‘고속철 기술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처음 해보는 고속철 양산이라 도면이 자주 바뀌었고, 직원들은 또다시 호환되는 부품을 찾아 헤매고 용접해야 했다. 좁은 객차 공간에서 일하느라 허리디스크를 앓게 된 직원도 있고, 동력 추진장치 점검 도중 고압 전력에 감전된 사람도 있다. 감전된 직원은 몸이 회복되기 무섭게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 묵묵히 일했다고 한다.

A씨는 “당시 수주전 승리 후에도 알스톰을 비롯한 국내외 안팎에선 한국 기술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며 “우리가 TGV를 이길 실력을 갖췄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국산 기술로 KTX-산천 수주전에서 이긴 게 17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찬밥 취급을 받는다면 누가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국책사업에 뛰어들겠느냐”고 반문했다.

일각에서는 국내 업체 ‘독점’ 때문에 해외 업체와의 경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일반적인 상황에서 경쟁은 필요하다. 하지만 기술 국산화를 위한 희생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방에 해외 기업을 불러들이는 것은 그간의 노력을 잊은 ‘단기 기억상실증’이란 지적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더구나 국내 철도 생태계를 주도하고 있는 현대로템은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철도사업 부문에서 총 2391억원의 적자를 냈다. 수익 규모를 뛰어넘는 연구개발 투자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지금 국내 철도산업에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