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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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 거주하는 A씨(67)는 이달 초 보이스피싱을 당한 직후 부랴부랴 범죄자들이 빼간 자금의 이동경로를 살펴보다가 이상한 대목을 발견했다. 보이스피싱 일당은 A씨로부터 획득한 신분증 사진과 B은행 계좌번호 비밀번호 등을 통해 B은행 계좌에서 A씨 예금 중 1000만원을 쿠팡 계좌로 이체했다.

그리고 A씨 개인정보를 활용해 A씨 명의로 만든 C저축은행으로도 5500만원을 보냈다. 이 중 600만원은 다시 쿠팡계좌로 송금했다. 범죄자들은 이런 식으로 서로 다른 명의로 된 8개 쿠팡 계좌로 200만원씩, 총 1600만원을 옮겼다.

A씨는 의아했다. 보이스피싱 일당이 은행 계좌에서 빼간 돈을 한꺼번에 다른 계좌로 옮기지 않고 굳이 번거로운 방식을 택해서다. 금융회사가 아닌 온라인쇼핑 플랫폼인 쿠팡에 계좌를 8개씩이나 만들어 200만원씩 나눠 보낸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쿠팡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보던 차에 쿠팡이 미리 돈을 충전해놓고 결제할 때 사용하도록 만든 선불충전결제(쿠페이머니)와 상품을 먼저 구매하고 일정 기간 후 돈을 내는 후불 결제(나중결제)를 운영하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중에서 나중결제의 한도가 200만원인 점에 주목했다.

쿠팡의 나중결제는 심사가 엄격한 신용카드와 달리 쿠팡이 제시한 최소 기준만 충족하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다. 다른 플랫폼에 비해 한도도 많다. 현재 네이버와 토스의 후불결제는 월 30만원, 카카오는 15만원이다. 최대 할부기간은 11개월로 이 역시 다른 플랫폼보다 길다. 규제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롭다.

네이버·카카오·토스 등 다른 플랫폼 기업의 후불결제는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돼있어 한도·연체율·할부 등에 관해 금융당국의 관리를 받고 있다. 반면 쿠팡은 별도 규제를 받지 않고 있다. 직매입한 물건에 대한 외상 개념이기 때문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 금융당국의 입장이다.
[단독]'쿠팡 결제' 이렇게 쓰일 줄은…보이스피싱에 악용됐다
이같은 특성 때문에 쿠팡 나중결제는 ‘깡’으로 불리는 불법 현금융통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이미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나중결제를 할인 판매하는 방식으로 깡을 하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판매자가 10만원어치 물건을 나중결제로 20% 할인해 넘기는 대신 구매자로부터 8만원을 현금으로 받는 식이다.

주로 구매자가 판매자한테 사려고 하는 물건과 관련한 온라인 주소를 보내주면, 판매자가 나중결제로 해당 물건을 구매한 뒤 ‘선물하기’ 방식으로 구매자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A씨는 “보이스피싱 일당이 먼저 나중결제로 이 같은 거래를 해 현금을 확보하고 보이스피싱으로 가로챈 돈으로 결제대금을 지급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직접 금융회사 영업점에 나타나 범죄로 빼돌린 자금을 출금하는 대신, 가로챈 돈보다 적은 금액을 번거롭지만 눈에 덜 띄는 방식으로 획득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A씨는 보이스피싱범들의 자금 이동경로를 확인한 직후 이 같은 사실을 경찰에 추가로 알린 상태다. 경찰은 범죄자들이 쿠팡 나중결제가 범죄수익 이동통로와 세탁에 활용됐는지 등을 수사하고 있다. A씨는 쿠팡 고객센터에도 보이스피싱 피해 사실을 신고하고 범죄자들이 쿠팡 계좌로 옮긴 자금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피해 구제를 받을 수 있는지 등을 문의했다. 하지만 “경찰 수사에는 협조하겠지만 그 외 문의사항에 대해선 알려줄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이와 관련해 쿠팡은 “해당 범죄는 나중결제 서비스와는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쿠팡 관계자는 “쿠팡은 부정거래 행위에 매우 엄중히 대처하고 있으며 부정거래 모니터링 시스템과 전담팀도 운영하면서 관련 행위의 탐지와 예방에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무관용 정책에 따라 부정거래 행위 및 가담자들을 차단하는 조치도 취하고 있다”고도 설명했다.

김진성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