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심스의 영상작품 ‘Lessons I-CLXXX’와 벽면 페인팅 ‘GIRRRLGIRLLLGGGIRLGIIIRL’.  현대카드 제공
마틴 심스의 영상작품 ‘Lessons I-CLXXX’와 벽면 페인팅 ‘GIRRRLGIRLLLGGGIRLGIIIRL’. 현대카드 제공
세계 미술계가 한국을 주목하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중반 즈음이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먹고 살 걱정 없이 자란 세대’(1970년대생)가 새로운 소비 주체로 떠오른 덕분이었다. 고흐, 모네 등 교과서에서나 보던 ‘블록버스터’급 명화와 당시에 높은 몸값을 자랑하던 작가들이 한국을 찾았고, 그럴 때마다 전시 티켓은 ‘솔드 아웃(sold out·매진)’됐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2차 호황’을 이끈 주역은 단연 MZ세대(밀레니얼+Z세대)다. ‘미래의 피카소’에 열광하는 이들을 겨냥해 세계적인 화랑들은 앞다퉈 한국에 지점을 냈고, 국내 화랑들은 MZ세대가 선호하는 작품을 확보하느라 분주했다. 올 들어서도 이런 트렌드는 계속되고 있다. 서울 한남동 ‘현대카드 스토리지’에서 열리고 있는 ‘스며드는 빛’ 전시가 대표적인 예다.

MoMA가 인정한 고수들의 작품

타이 샤니의 신작 ‘NH Crypt 1’.    다울랭갤러리 제공
타이 샤니의 신작 ‘NH Crypt 1’. 다울랭갤러리 제공
이곳에선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소장하고 있는 미디어아트 작가 5인의 영상작품 5점을 만날 수 있다. 올해 세계 미술계를 달군 핵심 키워드인 ‘2030·여성·흑인’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작가 다섯 명 중 세 명이 30대 흑인이고, 이 중 두 명은 여성이다. MoMA 소장품인 만큼 작품 수준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한국에서 MoMA 소장품 전시가 열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MoMA는 좀처럼 소장품을 다른 곳에 빌려주지 않는다. 현대카드 관계자는 “2006년부터 MoMA를 후원해온 덕분에 이번 전시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마틴 심스(34)의 영상 작품 ‘Lessons I-CLXXX’와 함께 벽면의 보라색 페인팅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탐구한 실험적 작품들로, 영상에는 한국 홍대 거리의 버스킹 장면도 등장한다. 산드라 무징가(33)의 ‘Persuasive Light(스며드는 빛)’는 종교적인 삼면화를 연상시키는 스크린 구성이 인상적이다. 흑인이라서 차별받는다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조망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아메리칸 아티스트(예명·33)가 빅데이터 악용의 위험성을 경고한 ‘2015’, 미디어아트 분야의 거장으로 꼽히는 하룬 파로키(1944~2014)와 트레버 페글렌(48)의 독창적인 작품들도 주목할 만하다. 작품을 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미디어아트 특성상 사전 예약 후 관람해야 한다. 만 12세 이상부터 볼 수 있다. 전시는 9월 25일까지.

‘터너상’ 英작가, 美 3040 ‘신성’ 그룹전

한남동 다울랭갤러리에서는 개관전으로 타이 샤니(46)의 국내 첫 개인전 ‘네온 상형문자 : 공동체 저변에서’가 열리고 있다. 샤니는 영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현대미술상인 ‘터너상’을 2019년에 받은 여성 작가다. 폭력과 환상, 신화와 여성주의 등 다양한 주제를 담은 전위적인 설치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김요한 다울랭갤러리 대표는 “최근 국내 관객들의 수준은 유럽의 미술 중심지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며 “앞으로도 유럽에서 떠오르는 실험미술가들을 소개할 것”이라고 했다. 전시는 다음달 9일까지.

서울 성북동 BB&M갤러리에서 열리는 ‘드림 라이프’도 주목할 만한 전시다. 전시 기획자는 뉴욕 미술계의 거물인 댄 캐머런(66). 미국 뉴 뮤지엄을 비롯해 여러 유명 미술관의 수석큐레이터를 지내고 2006년 이스탄불 비엔날레 등 각종 국제 행사를 총괄한 인물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뉴욕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30~40대 작가 5명을 소개한다. 모두 MoMA나 로스앤젤레스카운티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 등 유명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된 작가들이다. 라틴계 작가인 에스테반 카베자 드 바카(37), 아르메니아계 작가 라피 칼렌데리안(41) 등이 선보이는 다양한 화풍의 작품들이 이국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전시는 7월 2일까지.

업계 관계자는 “한국이 세계 미술업계가 주목하는 ‘뜨는 시장’이 되면서 요즘 서울에서 열리는 전시는 글로벌 ‘미술 수도’인 미국 뉴욕이나 ‘미술 올림픽’(베네치아 비엔날레)이 열리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못지않은 수준이 됐다”고 말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