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일본 국회에서 아소 다로 당시 부총리 겸 재무상(현 자민당 부총재)이 일본 기업을 "수전노"라고 비난한데 대해 해명하는 모습. 야당인 민주당도 "동감한다"고 아소를 두둔했다.(자료 : ANN뉴스)
2015년 일본 국회에서 아소 다로 당시 부총리 겸 재무상(현 자민당 부총재)이 일본 기업을 "수전노"라고 비난한데 대해 해명하는 모습. 야당인 민주당도 "동감한다"고 아소를 두둔했다.(자료 : ANN뉴스)
“수전노 같은 일이다.”

2015년 1월 아소 다로 당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현 자민당 부총재)은 기업에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기업이 막대한 이익을 올리면서도 임금인상과 설비투자에 인색하다는 비판이었다. 경제단체 초청 신년회에서의 발언이어서 파문이 더 커졌다.

몇일 후 열린 국회. 야당의 거센 비난이 예상됐던 것과 달리 민주당의 야나기사와 미쓰요시 참의원은 아소 부총리를 감쌌다. 그는 “(발언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며 “실언이라는 비판이 있지만 본질을 꿰뚫은 문제제기였다”고 말했다.

내부유보금에 부정적인 일본 정치권의 시각은 기시다 후미오 총리 내각 들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스즈키 준이치 재무상은 작년 10월 취임 기자회견에서 “기업의 내부유보가 전례없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유보금 절반, 대기업에 편중

내부유보금은 기업이 매년 벌어들인 이익의 일부를 쌓아올린 적립금이다. 일본 정치권이 민간 기업의 금고에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배경에는 괘씸함이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일본 정부는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전 총리의 대규모 경기부양책)를 통해 지난 10여 년간 의도적으로 엔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법인세를 낮춰줬다. 기업의 이익이 늘면 자연스럽게 임금 인상과 소비 진작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였다.

하지만 기업은 고용과 임금을 늘리는 대신 비정규직 근로자 비중을 높여 인건비를 더 줄였다. 그 결과 기업의 부가가치 대비 인건비 비율을 나타내는 ‘노동분배율’이 2012년 72.3%에서 2018년 66.3%로 떨어졌다.

같은 시기 내부유보금은 1.6배 늘었다. 2020년 일본 기업의 내부유보금은 484조엔(약 4666조원)으로 9년 연속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정치권이 ‘돈을 벌게 해줬더니 자기 주머니만 채운다’고 비난하는 이유다. 이중과세라는 지적에 한 발 물러섰지만 여당인 자민당이 내부유보금에 비례해 세금을 물리려 한 적도 있다.

일본 기업이 수전노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유보금을 늘리는 것은 ‘만에 하나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인식이 워낙 뿌리깊기 때문이다. 거품(버블) 경제 붕괴 이후 30년 장기 침체에서 살아 남은 일본 기업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1년 동일본대지진, 2019년 코로나19를 차례로 겪었다.

미중 패권경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경영 환경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어진 상황에서 ‘포스트 코로나’에 대비한 사업 전환도 서둘러야 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해 자금을 최대한 확보해둬야 한다는게 기업의 입장이다.

유보금의 절반인 242조엔은 자본금 10억엔 이상의 대기업에 편중돼 있다. 정치권의 비난과 달리 대부분의 기업들은 주머니를 채울 정도로 벌지도 못했다는 의미다.

가계 금융자산 2000조엔의 우울

일본의 저축률 추이(자료 : 블룸버그)
일본의 저축률 추이(자료 : 블룸버그)
일본인들도 지갑을 열지 않는 것은 기업 못지 않다. 2021년 일본의 가계는 연 수입의 34.2%를 저축했다. 저축률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보다 10%포인트 이상 높아졌다. 지난해 월 평균 소비지출은 27만9024엔으로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보다 4.6% 감소했다.

미국과 유럽 같은 ‘보복 소비’도 일어나지 않았다. 2021년 소비지출은 2020년보다 0.7% 증가하는데 그쳤다. 그 결과 2021년말 일본 가계의 금융자산은 2023조엔으로 처음 2000조엔을 돌파했다. 1992년 1000조엔을 돌파한지 30년 만이다.

일본 정부가 한숨 짓는 건 가계 자산의 증가가 반드시 일본이 풍족해졌음을 의미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가계 금융자산의 54%인 1092조엔은 예금과 현금에 묶여있다. 주식 비중은 10%에 불과하다. 주식과 현금 비중이 각각 40%, 10%인 미국과 반대다.

현금과 예금을 주식시장과 같이 성장 분야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것은 일본 경제의 부활과 직결되는 문제로 평가된다. ‘잃어버린 30년’을 겪는 동안 일본의 잠재성장률은 1990년대 후반이후 미국과 유럽연합(EU)을 밑돌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수십 년째 개인 금융자산을 ‘저축에서 투자로’ 돌리기 위해 애써온 이유다. 지난 1일에도 일본 정부는 개인의 주식투자 비과세 제도(NISA)를 확대해 “가계 금융자산을 저축에서 투자로 전환시키겠다”고 밝혔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간판 경제정책인 ‘새로운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안이다.

투자 '트라우마'에 저축만

하지만 버블 붕괴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주식증서가 휴지조각이 되는 것을 경험한 일본 중장년층은 여전히 투자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1980년대부터 매월 1만엔씩 닛케이225지수에 투자했다면 40년간 수익률이 2%에 불과하다는 증권사 분석 결과도 있다.

상당수 일본인들은 연금 만으로 노후 생활이 가능하다고 철썩같이 믿었다. 2019년 6월 일본 금융청이 “65세 이상 부부의 노후자금이 최대 2000만엔 가량 부족할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이 같은 믿음도 산산조각 났다.

미래는 불안한데 임금은 30년째 제자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 30년간 미국의 명목 평균연봉은 2.6배, 독일과 프랑스는 2배 느는 동안 일본은 4% 오르는데 그쳤다. 미래가 불안한 일본인들이 한 푼이라도 더 저축을 늘리려는 이유다.

일본인들이 투자를 꺼리더라도 개인의 예금을 맡아서 운용하는 은행이 적극적으로 투자와 대출에 나서면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2021년 3월말 일본 금융회사 예대율은 58.1%까지 떨어졌다. 경기가 부진해서 돈 빌려줄 곳이 마땅치 않다보니 은행들이 예금잔고의 60% 밖에 대출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머지 예금잔고 40% 대부분도 안정적이지만 수익률은 낮은 국채에 투자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경제 전반적으로 성장 분야로 자금이 흘러 들어가지 않는 구조가 굳어졌다”고 지적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