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소설가 에르베 르 텔리에가 2일 서울의 한 식당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2020년 프랑스 공쿠르상 수상작인 《아노말리》의 작품세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민음사 제공
프랑스 소설가 에르베 르 텔리에가 2일 서울의 한 식당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2020년 프랑스 공쿠르상 수상작인 《아노말리》의 작품세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민음사 제공
평론가와 독자의 마음을 한꺼번에 사로잡는 소설은 흔치 않다. 작품성이 있으면 대개 지루하고, 재미가 있으면 수준이 낮기 십상이다. ‘OO문학상 수상작’이라는 띠지가 감긴 책을 끝까지 읽었다는 독자가 많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품성·흥행' 잡은 佛작가…"넷플릭스? 문학만큼 상상력 못줘"
2020년 프랑스 공쿠르상 수상작인 《아노말리》(‘이례적인 일’이란 뜻)는 작품성과 흥행성이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흔치 않은 소설이다. 책 제목 그대로 ‘이례적인 일’이다.공쿠르상은 노벨문학상, 부커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아노말리》는 같은 해 메디치상, 르노도상, 데상브르상 후보에도 오르는 등 작품성을 확실하게 인정받았다. 동시에 프랑스에서만 110만 부 넘게 팔리는 등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이름을 올렸다. 독일에서 출간 1주일 만에 10만 부 이상 나가는 전 세계 판매량은 계속 불어나고 있다.

이 책을 쓴 저자 에르베 르 텔리에가 2일 한국을 찾았다. 그에게 작품성과 대중성을 한꺼번에 잡은 비결을 묻자 “나는 항상 대중적인 소설을 쓰기를 원하고, 이번에는 조금 더 대중적이기를 원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내가 ‘나’이게 하는 건 뭘까”

텔리에는 《아노말리》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언젠가 꼭 쓰고 싶었던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란 주제를 《아노말리》에 담았다”며 “그동안 수없이 많은 소설에서 쓴 주제란 점을 감안해 (지겹지 않게) 스릴러 등 여러 장르를 활용했다”고 했다. 이어 “또 다른 나를 대면했을 때의 여러 대응 방식을 다루기 위해 많은 등장인물을 넣었다”며 “자칫 독자들의 집중력이 흐트러질까봐 각 장이 끝날 때마다 극적인 장면(클리프행어)을 넣어 뒷이야기를 궁금해하도록 했다”고 덧붙였다.

《아노말리》는 똑같은 승객을 태운 똑같은 비행기가 3개월 사이 두 번 착륙하는 사건을 다룬 장편소설이다. 한 비행기에 탑승했던 청부 살인업자, 소설가, 변호사, 백인과 흑인, 남성과 여성, 동성애자 등 다양한 인물이 저마다 ‘또 다른 나’를 대면한다. 자기 살해부터 희생까지 ‘인간은 이해 불가능한 사건을 마주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탐구한다. 짧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 예측 불가능한 전개로 몰입감을 높인다. “오늘 비행기에서 또 다른 텔리에가 만들어진 것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아직 알 수 없다. 3개월 뒤를 기다려봐야 한다”며 웃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나를 나로 만드는 건 무엇인가’는 질문에 다다른다. “소설을 쓰면서 이런 걸 느꼈습니다. ‘나 스스로 결정한 삶의 양태, 나를 구성하고 있는 어떤 가치관은 누군가와 나눠가질 수 없다’고. 그게 또 다른 나라고 할지라도요.”

○“한국 영화 인상 깊게 봐”

《아노말리》는 코로나19가 터지기 전에 쓴 책이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더 각광받았다. 텔리에는 “코로나19 이후 금지된 비행기 여행을 다루다 보니 록다운(봉쇄령)에 지친 독자들에게 탈출구가 됐다”며 그는 “‘이례적인 일’이란 의미의 책 제목도 코로나19로 ‘미쳐 돌아가는 세상’과 맞물리면서 너무 멋진 제목이 됐다”고 했다.

소설에는 한국 음식점이나 한국 가수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그는 “록다운 기간에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한국을 많이 알게 됐다”며 “영화 ‘기생충’과 ‘오징어게임’ ‘부산행’ 등을 인상 깊게 봤다”고 말했다.

텔리에는 오는 5일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대 소설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강연할 예정이다. 그는 “넷플릭스, 인스타그램, 틱톡 등 여러 영상 매체가 문학을 위협하고 있지만, 문학만큼 독자들에게 상상력을 제공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텔리에는 끊임없는 실험과 도전으로 대체 불가능한 작가가 됐다. 1957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텔리에는 소설뿐 아니라 시와 희곡도 쓴다. 《사랑에 대해 실컷 말한》 《액체로 된 이야기》 《모든 행복한 가족》 《나와 프랑수아 미테랑》 등을 썼다. 국내에 출간된 건 《아노말리》가 처음이다. 로이터통신 과학 분야 기자 출신으로, ‘르몽드’에 사회 풍자글도 연재하고 있다. 2019년부터는 문학과 수학을 접목하는 실험적 문학운동 단체인 ‘울리포’의 회장도 맡고 있다. 울리포 회원에는 이탈로 칼비노 등 유명 작가뿐 아니라 마르셀 뒤샹 등 미술가도 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